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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별 ‘킹메이커’ 본문
‘킹메이커(Kingmaker)’란?
킹메이커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인을 권좌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지닌 정계의 실력자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직접선거제가 도입된 이후 5년마다 선거운동과 투표를 거쳐 대통령이 탄생하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의 정책 공약·선거운동 방향 등을 설정하거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지지자들을 하나로 뭉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조력자를 킹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
<center>대한민국 13대~18대 대통령 /조선DB<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을 만든 사람’을 알아봤다.
노태우 대통령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center>김윤환 /조선DB<
노태우와 김영삼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은 故 김윤환이었다. 1987년 제13대 대선이 치러지던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김윤환은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에 참여해 막후에서 자신의 고교 동창생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원했다.
또, 제14대 대선 때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투사 이미지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 내부 인사들을 설득해 강력한 지지 세력을 규합, ‘YS 대세론’을 굳혔다. 2대에 걸쳐 킹메이커 역할을 해내면서 정치권은 김윤환을 두고 ‘친화력을 갖추고 있으며 정국을 꿰뚫어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평을 했다.
그러나 1997년 ‘비영남 후보론’을 내세워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선출하면서 세 번째 킹메이커로 나섰지만 실패했다.
본명보다 ‘허주(虛舟·빈배)’라는 호(號)로 더 많이 불리던 그는 신문기자 출신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해 25년간 차관·청와대 정무수석·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직을 수행하는 동안 여당 사무총장 2번, 원내총무 2번, 정무장관 3번, 여당대표 2번을 지내는 등 화려한 정치 인생을 살다가 지난 2003년 암으로 별세했다.
김영삼 대통령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랐던 정치 세력은 ‘상도동계
(YS 자택이 위치한 지역명)
’라고 불린다. 서청원·김무성·정병국 등 여전히 정치판에서 영향력이 있는 다수의 전·현직 의원들이 상도동계에 속하지만, 故 김동영과 최형우를 빼놓고는 상도동계를 논할 수 없다.
이들은 YS가 야당 국회의원 시절인 197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다. ‘좌동영 우형우’로 불릴 만큼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훗날 YS 회고록에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로 표현됐다.
<center>김동영·최형우 /조선DB<
김동영은 1966년 국회전문위원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입법기능을 돕는 직무)
으로 정계에 입문해 4선 의원을 지냈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주도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민주자유당 창당에 기여했지만, 제14대 대선을 1년 앞둔 1991년 암으로 별세했다. 병을 숨기고 죽는 날까지 YS를 위해 일했다.
상도동계 행동 대장이던 최형우는 1980년 국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도 YS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YS가 발탁한 이래 6선 의원, 내무부 장관 등 정치 경력을 쌓다가 1997년 돌연 뇌졸중으로 정계 활동을 중단했다.
‘좌동영 우형우’와 더불어 김덕룡과 故 서석재도 원조 상도동계였다. 김덕룡은 국회의원 공보비서·당 총재 비서실장 등을 맡아 YS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고, 서석재는 상도동계 조직을 관리·운영하는 참모였다.
김대중 대통령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center>김종필 /조선DB<
1980~1990년대 김영삼·김대중과 함께 ‘3김(金) 시대’를 열었던 김종필은 충청도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5대 대선 때는 영호남이라는 두 축으로 지지층이 갈라져 있어 충청도가 ‘캐스팅보트(Casting vote)’ 지역이었다. JP의 지지 여부가 당선에 중요 변수였다.
호남 외에 지지 기반이 약했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에게 손을 내밀어 ‘DJP 연합’을 추진했다. 이념이 상반된 JP의 공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공동 정부 구성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후보는 DJ, 당선 시 국무총리는 JP, 내각책임제 개헌 등의 내용으로 DJP 연합이 성사됐고, 이를 통해 DJ는 충청표와 일부 영남표까지 얻어 당선됐다.
국민의 정부(DJ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된 JP는 실세형 총리로서 주요 인사와 정책에 권한을 행사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과 대북 정책 등을 놓고 DJ 세력과 균열이 생기면서 DJP 연합은 깨졌다.
JP가 정계를 은퇴한 지 10여 년, 충청의 맹주(盟主)로 상징적인 인물이 된 그에게 지금도 많은 현역 정치인들이 조언을 들으러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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