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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시민군 사망원인 본문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 사살한 518광주시민군의 정체성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5월 21일 대학살은 유언비어인가 사실인가? 광주사태 때 첫 사망자는 공수부대원이었다. 5월 19일 광주천변으로 떨어진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돌로 찍어 머리를 으깨어 죽였다. 시민군 김현채(당시 19세의 식당종업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양동)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시민군 최종북 (당시 15세로 무진중학교 3학년)도 5월 19일 광주공원 앞에서 발생한 그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또한 군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 이어 시위대는 버스로 순경 4명을 압사시켰다(사건 장면 동영상: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
그 다음날 20일에도 군경 편에서만 사망자가 있었다. 군인들에게 밥을 실어다 주는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차량으로 깔아죽였다. 3공수는 20일에야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부하들이 아침과 점심을 건빵으로 때우고 저녁식사마저 못했기에 밤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선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잔인하게 차량으로 깔아 살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 하사관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5월 21일 오후 1시 반경 시민군 장갑차 한 대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을 깔아죽였다. 부상병이 생겼다는 무전을 받은 지 20여 분이 지난 후 부상자들이 후송되어왔다. 한 사람은 차량에 깔려 다리를 다친 6지역대 張하사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당했다고 했다. 張하사의 말에 따르면 차량은 지그재그로 진압군을 향하여 마구 돌진해 왔고 그에 따른 부상자가 속출하자 부대원 모두가 겁을 먹고 피하기에 급급했으며 진압 또한 매우 과격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張하사와 함께 실려온 두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화물트럭의 운전기사와 조수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경상도 차량이란 이유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구타를 당했는지 옷도 찢겨지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5월 21일 당일까지는 사상자는 군경 편에서만 있었음을 시민군 오병길(당시 자가용 운전기사, 훗날 전남대 총무과 근무)은 이렇게 증언한다:
<<도청 안에서는 군인들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대형 군용 헬리콥터에 싣고 있었다. 군인들이 접근을 막아 멀리에서 얼핏 보았는데 전날 저녁에 시위대와 충돌로 인한 사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사상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공수부대원이나 경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살벌한 분위기로 보아 사상자가 시민이었다면 군인들이 도청 안으로 가져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6.html )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여 도청진압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여러 구의 시체가 상무관에 쌓여있었던바,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때로부터 27일 새벽까지의 시간대에는 분명 광주에 계엄군이 단 한 명도 없었음에도 어디서 수십 구의 시체가 생긴 것이었을까? (참고로, 5월 27일 새벽의 도청진압작전으로 발생한 시민군 사망자 수는 실제로는 4명이었음.)
그 의문을 풀어주는 단서의 하나로서 시민군 오병길은 시민군 사망자 중 상당수는 시민군 차량사고에 의한 것이었을 것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6.html )
5월 21일 오후 한시경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 한 명이 즉사하고 두 명이 부상입었다. 이수범은 그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는 도중 시민 쪽에서 가지고 있던 APC 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 쪽으로 달려 갔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은 2열 횡대로 해서 YMCA 앞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를 몰고 가니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몇 명 치어버렸다. 그때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공수부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기억을 하냐면 우리가 계속 시간 카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
http://cafe220.daum.net/_c21_/bbs_read?grpid=14LzD&mgrpid=&fldid=8yGb&page=1&prev_page
시민군은 의도적으로 군경을 차량으로 깔아죽였을 뿐 아니라, 사고를 내어 많은 시민을 죽였다. 5월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 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5월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총격사망자 대다수는 시민군 총기 싵탄에 의한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진실을 외면하고 유언비어 시류에 편승하던 당시 방송과 언론은 이런 진실을 보도하기에 너무도 인색하였기에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더욱이,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최초 발포자는 시민군이었음을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
광주사태 초기부터 살레지오고등학교를 비롯한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군 사격훈련이 있었던바, 당시 시민군이 목격한 총기 오발 사망 사고만 해도 10 건이 넘었으나, 그런 시민군 총기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시민군은 리어커에 시체를 싣고 광주시를 돌아다니며 '계엄군의 무차별발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러나, 광주시 당국의 요청으로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충정작전을 수행하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다.
시민군 김여수(당시 20세, 용접공)는 광주사태 당시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단다.
<언젠가 학운동에 있는 배고픈다리에서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등성이에서 군인들이 3, 4명씩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발사를 했다. 우리는 다리 부근의 주택에서 주로 총을 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모르기도 했고 또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시민군 조인호(당시 나이 20세, 다방 주방장)도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의 총성은 분명 시민군 화기에 의한 총성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군용 트럭 3대에 30-40명의 시민군들이 트럭 양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이 몰려들자 차를 멈추었다. 지원동 탄약고에서 무기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모여든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주었다. 수류탄은 트럭에 탄 시민군들이 2개 이상씩 소지해 버린 후여서 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카빈총은 내가 본 것만 해도 40여 정이 넘었다. 시민군이 지닌 것과 모두 합치면 꽤 될 것 같았다. 총이 분배될 때 고교생들도 받아가자 다시 회수하여 고등학생들은 갖지 말라고 했다. 그때 시민군 말로는 권총이 몇 정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먼저 지녔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리고 LMG 2정이 함께 있었는데, 27살 정도이고 키가 작은 청년이 월남전 혹은 군대에서 자신이 LMG 사수였다면서 도청 쪽으로 총을 3발 쏘았다. 총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시민군 장준영(당시 나이 19세 재수생)은 마구 사격한 쪽은 시민군이었으며, 그 충돌에서 시민군 편에서는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페퍼포그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 차에서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 한하여 실탄과 함께 총기가 배급되고 있었다. 조금 후에 계엄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느 쪽에서부터 먼저 총성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5분 정도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시위군중들은 다수가 흩어졌고,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들이 주로 총기를 지급받고 총격전에서도 이 사람들이 주로 응사를 하며 저항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부상자는 생기지 않은 것 같다.>
시민군 이재춘(당시 나이 21세)은 5월 21일 도청 광장에서 총성이 울린 이후 시민군 편에서는 사망자는커녕 부상자 한 명 없었고, 군인들만 죽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2일 아침 도로로 가보니 어젯밤에 총격으로 인해 시민군들은 부상 하나 없었는데, 군용 트럭 안에는 군인 일등병이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죽은 군인은 공수가 아니라 일반군인으로 운전병이었다.> (출처)
그 총소리에 이전까지 도청에서 계속 들렸던 총소리가 뚝 그치고 시내는 고요해졌다. 그런데 그때 무등산 쪽에서 군용 헬기 3대가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우리들 상공을 선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 녀석도 한패니 쏘아 버린다"면서 헬기 한 대를 향해서 총을 쏘았다. 그러자 총에 맞은 헬기는 비틀거리면서 송정리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2대의 헬기는 아주 고공으로 비행하였다.> (출처)
이렇듯,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현장을 목격하였던 시민군은 이구 동성으로 그날의 총성은 시민군이 발사한 화기에서 난 총성이었음을 증언한다. 심지어 영화의 가짜가 아닌 진짜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조차 5월 21일 사태 때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 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몇 사람이 뛰어들어오면서 지금 도청의 공수부대들이 퇴각하고 있으니 빨리 도청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나가는 듯하다가 광주천을 따라 들어와 시민들의 등 뒤에서 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주저하였다. 그래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만일 공수대원들이 진짜 퇴각을 한다면 물러가버린 뒤에 도청으로 가봐야 할 일도 없을 테고 무장시민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니 만일을 위해서 광주천에 매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들은 광주천 봉쇄를 위한 무장시민의 배치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리더급 무장시민에게 양림다리에서 현대극장밑 다리까지 무장시민을 매복시킨 다음 기관총을 배치하도록 하고, 만일 진입해 들어오는 공수대들을 발견하더라도 신호없이 개별사격은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공수대와 무장시민의 구분을 위하여 「담배연기」라는 암구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무장시민의 배치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불로동 다리(불로교)위에서 AR소총을 거치하고 M1소총과 AR소총에 탄알을 장진, 시험사격을 하고 나서 매복에 들어갔다.> (http://blog.naver.com/bookclub/40013306416 )
당시 총기별 총성을 구분할 줄 아는 이들은 5월 21일 시민군이 선제 사격하였음을 증언한다. 공수부대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어 있지 않았었고, 군인들을 깔아죽이던 시민군 장갑차와 군인들을 덮치던 시민군 차량을 정지시키기 위해 장교들이 몇발의 경계용 실탄을 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자기 부하들이 모두 시민군 장갑차와 차량에 깔려죽도록 내버려둘 지휘관은 그 어느 나라에도 없으며, 5월 21일 광주에서 퇴각하기 직전의 공수부대의 사격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시민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인가? 당시 광주의사들은 시민군 사망자들이 시민군만 소지한 총기에 의해 총상을 입었다는 소견을 남겼거니와 시민군들은 그런 소견을 뒷받침해 주는 증언을 한다.
예를 들면, 시민군 장준영(당시 나이 19세 재수생)은 위장 시민군이 있었다는 증언을 한다.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시위대로 변장하여 시위대들의 행동양식과는 다른 잔악함을 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장준영은 자신이 목격하고 겪었던 일들을 이렇게 증언한다:
<밤이 되면 계엄군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위대를 가장하여 별별 일을 다 저지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더욱 행동에 조심하였고 그런데 백운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즈음에 난데없는 사격이 가해졌다.
앞에 가는 지프차는 백운동 로터리 철도를 막 넘어서고 있었고 우리는 로터리 광장으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다. 시위대로 가장한 계엄군은 계속 사격을 가해 왔다. 병원입구에는 10명 이상의 시민군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신분을 확인했다. 알고 보니 그곳에 있던 시위대들도 우리와 같은 장소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 대원들은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빠져나와 보니 버스 뒤쪽에 총탄 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고 했다.
위험하고 불안해서 다시 서방 쪽으로 갔다. 서방에 있는 시위대들에게도 앞에서 소식을 알리고 광남로 현 원광대 한방병원 앞에 도착하여 대기하던 중에 느닷 없는 총성이 울렸다. 모두들 원광대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사태를 관망하였다. 나는 페퍼포그차 안에 있었다. 광남로 로터리에는 부서진 장갑차 한 대가 있었다. 총소리에 우왕좌왕하여 우리는 모두 병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병원측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차로 밀어 부치겠다고 항의하자 문을 열었다.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서 총소리 나는 쪽을 바라 보았다. 백운동 방향에서 총소리가 난 것 같았다. 우리는 총소리 나는 쪽을 향해 대응사격을 하였다. 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총소리가 울리는 쪽을 향하여 마구 응사를 하였다. 잠시 후 총성이 멎고 나서 우리쪽 피해상황을 조사했다. 별 피해는 없었다. 아마도 계엄군 측에서 시민대원들을 교란시키려는 작전이 아닌가 싶었다. (출처 )
이러한 증언들은 시민군 중 누구도 국군이 시민군에게 사격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들은 단지 시민군이 (혹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시민군이) 시민군을 향하여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사망한 시민들 시신에서 발견된 총상 역시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 이것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장면과 너무도 다른 진실이다. 시민군이 쏘는 시민군 총기에 시민군이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과학적 증거와 현장 증인의 증언이 일치한다.
영화에서처럼 군인이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단지, 시민군끼리 오인사격하는 시가전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오인 사격에 대한 시민군 편에서는 국군이 시민군으로 위장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군 차림의 시민군의 정체성이다. 우선 군인의 모발은 짧기 때문에 금방 차이가 난다. 그러면 시민군으로 위장한 시민군의 정체성은 누구인가? 탈북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그들은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었다고 말한다.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장발을 하고 시민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시민군 틈바구니에 섞여 있다가 등 뒤에서 시민에게 총을 쏘아 사살한 후 군인이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시민군에게만 있었던 총기들. 광주 의사들이 밝힌 과학적 진실은 사망자들의 사인은 바로 이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시민군 총으로 쏘아 입힌 총상이라고 증언한다. 등에서 심장을 향해 정확히 쏘아서 사망케한 사건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 장면대로라면 실탄은 정면에서 날아와야 했다. 그런데 탈북자들 증언대로
뒤에서 쏘았으며, 심장을 향해 정확히 쏘았다. 만약 단순한 총기조작 오발 사고라면 심장을 향해 정확히 쏠 수 있을리 만무하기에 사격 전문가에 의한 총상이 분명하며, 게다가 분명히 칼빈에 의한 사망이었다. 광주 의사들도 그렇게 소견을 남겼으며, 1996년 재조사에서도 시민군 총기에 의한 사인이 재확인되었다. 영화대로 공수부대와 시민의 대치하였다면 분명 앞에서 총을 맞았어야 했고, 공수부대는 칼빈을 소지하지 않았다. 탈북자들 증언대로 이사람은 분명 북한군 특수부대원이 죽인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美 뉴스 보도영상
518광주시민군 총기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518무장시민군이 사용하던 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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