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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와 유언비어5.18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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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와 유언비어5.18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

천아1234 2021. 8. 9. 09:39

5.18시민군의 최초 무장시점에 대한 5.18측의 거짓 주장



국민 여배우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다름아닌 우리 사회의 유언비어였음에도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들로부터의 자성의 소리가 아직 들리고 있지 않다. 아무리 유언비어가 대세였다 하더라도 유언비어는 악의의 거짓말이요 악의의 픽션이다. 수십 억대의 사채 빚더미에 눌려있다 자살한 안재환의 자살원인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악의의 피션이다. 그리고 그 원시적인 논리는 안재환이란 피해자가 있으니 최진실이 가해자라는 것이다. 최진실은 큰 돈을 빌려줄만한 경제력이 있으니 사채업자였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원시적인 논리에, 그런 유치한 주장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최진실의 자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삶의 의미 상실이요, 그녀가 갑자기 삶의 의미를 상실했던 첫번째 이유는 그녀에게 모든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유언비어들이었음에도 세상은, 매스컴은 좀처럼 그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지난 9월 30일에 최진실은 여성월간지 Queen의 김모 기자에게 전화걸어 "사채설 유포자가 잡혔으니 이제는 사람들이 내 진실을 믿어줄 줄 알았어. 그런데 토론 게시판에서 내 이야기에 서로 찬반양론을 펼치는데, 아직도 내가 안재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덕 사채업자로 그대로 묵인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라며 "나 너무 떨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한다 (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3/2008102300942.html ).  

그런 류의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방어하는가? 최진실은 "죽으면 내 진실을 믿어줄까"라며 "내 이름은 최진실인데, 사람들은 나를 최가식이라고 부르네. 너무도 슬픈 일이지 않니. 환희, 준희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엄마보단 죽어서 진실이 밝혀진 엄마가 낫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3/2008102300357.html ). 한때 인기의 정상에까지 올랐었던 최진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악성 유언비어와 싸우는 최후의 방법은 자살이었다. 자살--분명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되, 진실과 거짓의 대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그녀는 몰랐다.



김대중 세력이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겠다며 미국 쇠고기에 관하여 지난 여름에 퍼뜨렸던 유언비어들이며, 국민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토론게시판의 유언비어성 글들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얼마나 유언비어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사태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퍼졌던 유언비어들이다. 광주에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가해자들은 당시 시민군이라 불리어졌던 5.18무장단체들이었음에도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썼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과 그 동조 세력은 책임전가를 위해 유언비어를 지어냈으며, 지난 28년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런 불순한 픽션에 속아왔다.

광주사태 논의의 대상은 폭동이지 시위가 아니다. 5.18측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민군이라 규정하였으며 시위대라 부르지 않았다. 즉, 5.18사건이란 시위가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폭동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시위란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던 시위를 말하며, 5월 18일 이후에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더 이상 없었고, 단지 정체 불명의 무장단체가 주도하는 유혈무장폭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박남선씨와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 등이 시민군 리더였으되 아직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별도의 무장조직이 있었다. 위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당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시민군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 무장조직이 있었음을 증언함을 듣는다 (아래의 복면무장단체 사진 참고).



광주청문회 위원장이 문동환이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자는 격이었다. 문동환은 증인으로 출석해야 할 인물이었지, 결코 광주청문회를 주관하여서는 아니될 인물이었다. 광주사태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일어났다.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가 제2의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연설했었을 때 바로 그것이 유혈폭동 선동이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동학난과 같은 유혈폭동을--유혈폭동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역사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계급투쟁을 역사의 목적, 역사적 사명과 동일시하던 문익환 목사의 사관은 분명 공산주의 사관이었으며, 최소한 좌익사관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폭동을 선동하였던 자들의 이념이었기에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의 편파적 시각에 청문회를 맡겨서는 이니되었다.

폭동 선동가들에게 민중의 계급투쟁이란 이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동 선동의 방법은 매우 치졸하였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여수로 보낸 후에 이른바 "박관현 사망설"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고, 광주경찰에 의한 "박관현 사망설"이 폭동의 기폭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5월 18일 오후 한시 반부터 금남로 일대에서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수천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난동자들로 변해 광주의 여섯 파출서를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날 5월 18일 낮의 화염병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이 미리 제조해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왜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화염병을 미리 제조해 놓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했었으나 문동환 위원장이 주관하는 광주청문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다.

5월 18일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수에 있었으며 여수에서 광주폭동을 생중계하는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저녁부터 북한에서 광주폭동이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바로 박관현과 동행했던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 양강섭씨의 증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06.html ). 그리고,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 다른 방송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광주폭동을 생중계하였다는 사실은 그날 이미 북한 세력이 광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러면 북한 세력이 어떻게 미리 알고 광주에 잠입해 있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실시간 북한에 사태의 전개상황을 전송하고 있었는지도 청문회 질문 대상이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에는 다시는 광주로 돌아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만약 확인되지도 않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흥분하여 파출서들을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반응이었다면 오늘날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지만 최진실은 정말로 죽었다. 전자의 경우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 뿐이었는데도, 일본에서 푸른 눈의 목격자로 훗날 알려진 힌츠페터가 달려오게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던데 비해, 후자의 경우 사람들이 국민 여배우를 너무 쉽게 잊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의 경우에서 유언비어는 정당화될 수 없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망설 유언비에 흥분하여 파출서를 파괴한 행위도, 한 가련한 여성을 상대로 무수한 군중이 미확인 유언비어로 공격한 행위도 결코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박관현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뿐이었는데도 폭동을 일으켜야 했을 이유였다면 5월 20일 시민군이 버스로 순경 4명을 숨지게 하였다는 뉴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광주청문회가 공평하려 했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을 사안이었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이미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수일 전에 버스를 징발하여 유혈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이것은 광주사태 발생원인에 직결되는 문제요, 따라서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그날 새벽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으로 3공수 정관철 중사를 깔아죽인데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5월 20일 새벽에야 광주에 도착한 3공수는 19일 온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19알 저녁식사분이라도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일군의 난동자들이 급식차를 쓰러뜨리니 놀라고 당황하여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난동자들은(그 다음날부터 시민군이라 불리움) 그 자리에서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던 것이었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 갓 도착하였기에 아직 폭동 진압에 동원되지도 않았으며,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으며, 더구나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는데 광주시민들이 그를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민군에 의한 정관철 중사 살인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정서는 무엇이었던가?

시민군은 경찰과 군인만 차량 사고로 죽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광주시민을 차량사고로 죽였다. 광주사태의 처참한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그 타박상 가해자들은 시민군 차량 사고를 낸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의 책임전가 유언비러에 의해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 썼으되 실제 가해자는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자가용 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 역시 모두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다. 5월 21일의 집단발포 사건의 진상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4명 사망이요, 시민군이 시민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이면서 선제 발포하자 이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공중으로 공포탄을 발사하였기에 누명을 쓰게 된 것뿐이었다. 청문회에서 발포명령자를 찾았으나 실탄 지급 없는 발포 명령이 있을 수 있겠는가? 7공수는 단 한 개의 실탄도 없어 광주향토사단 한동석 중위에게 경계근무용 실탄 2상자(200발)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은 30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있었다고 증언하거니와 전남대 오병길씨 역시 시민군 편의 발포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탈북군인들은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시민군끼리 오인 총격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거니와 광주사태 당시 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피아를 혼동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여기서 북한군의 개입 여부는 별도로 한다 하더라도 시민군 총격전에 의한 시민군 사망의 가해자가 누구냐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던 광주 시내에서 시민군이 시민군에게 총구를 겨느고 있었을 때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가? 왜 엉뚱한 군인이 누명을 써야 하는가?



그러기에 광주청문회에서 5.18무장단체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한 규명은 무 척 중요한 문제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5.18측은 광주청문회 때 그 문제에 정직하였는가? 총기로 무장하고 발포하면서 하는 시위는 없기에 5월 21일부터 시위대 대신 시민군이란 명칭이 통용되었거니와 그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5월 19일 3시였다. 흔히 광주청문회에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무엇이 밝혀졌는가? 정상용 당시 광주도청 항쟁 지도부 외무부장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밝혀진 것은 5월 21일 낮 12시 이전에 시민군은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민군 편 증인 김영택 기자와 국군 편 증인 임정복(당시 31사단 작전참모 보좌관) 모두 시민군이 5월 20일 이미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거니와 위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 역시 시민군이 5월 20일에 이미 총기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