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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총기사건 본문
5.18불순세력이 이분을 살해한 거였어?
광주사태에 대하여 가장 큰 인식상의 오류 중 하나가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의 주체였다는 인식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이 그런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것이 시위였든 폭동이었던 진압의 주체는 광주 및 그 인근 지역 경찰이었다. 위의 동영상은 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가 1980년 5월 22일에 보도한 광주사태 뉴스인바,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 장면이 동영상 시작후 1분 10초부터 2초간 보인다. 이처럼 광주경찰이 먼저 시위진압을 하다가 5월 18일 오후 3시경 기동경찰 45명이 인질로 납치되니깐 광주경찰서가 광주향토사단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며, 광주향토사단이 그 예하부대였던 7공수 2개 대대를 보내 주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의 광우사태 때 쇠파이프와 돌맹이 외에는 비무장이었던 시위대 수가 7천명만 되어도 전경 이만 명으로도 당해 내지 못함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 광주사태의 경우 비무장 시위대가 아니라 무장시위대였으며, 그 수도 광우사태와 비교도 안되는 수였다. 그러니 7공수 2개 대대 2백여명으로 막을 수 있는 시위가 아니였으므로 19일 11공수가 추가 지원되었으나, 여전히 진압의 주체는 광주경찰서였으며 광주향토사단은 그 보조적인 역할로서 11공수 병력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5월 21일까지는 진압의 주체는 광주경찰서였으며, 21일에 광주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후 27일 새벽까지 광주에는 군인이 한 명도 없다가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의 주체는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였다.
5월 22일부터 폭동진압의 주체가 계엄사가 되는데, 그 이유는 5월 22일 해방구가 설치되자 광주경찰서가 시민군 지휘 하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쉬운 말로 광주경찰이 반군의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즉, 광주에서 반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군사독재자 모택동의 중공군도 그 출발은 시민군 형태였으며, 점령지역에 해방구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혀나갔던 것이며, 쿠바의 군사독재자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시민군을 도시 게릴라로 동원하였던 것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월맹과 쿠바의 도시 게릴라 방법을 그대로 본땄던 것이므로 광주사태 당시 해방구 설치의 의미는 시민군 군정이었으며, 광주경찰이 그 지배 하에 있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계엄사가 진압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했었던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동원되었던 기동경찰이 공수부대로 언급되는 실수가 지난해 7월의 KBS 방송에서도 있었다. 기동경찰이 최류탄 발사하는 장면을 방영하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운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진은 왜 종종 광주시민이 광주시민군을 공수부대로 오인하였었는지 보여주는 한 예이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이해찬이 북한군 사진을 들고나와 광주시민군 사진이라고 사기쳤을 때 광주시민 모두 침묵하였던 것으로 보아 광주시민 대다수는 각 군의 군복 식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시민군의 만행을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언급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리고 시민군도 위의 복장 차림의 시민군과 시가전을 치루었다는 증언을 한다. 즉, 시민군 스스로도 복장으로는 피아를 구별치 못했던 것이다.
위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라. 5.18무장단체가 철모를 썼다는 것은 전투를 하겠다는 것이다. 저 군모는 기동경찰의 군모로 보이나 총을 들었을 때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더구나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할 때 그 의미는 더욱 달라지는 것이다.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병력의 이동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은 모두 군인인 줄로 안다. 그러나, 저 병사들은 복장이 괴이하다. 저런 복장은 도시 게릴라 방법을 위해 필요하였는가 아니면 민주화운동을 위해 필요하였는가? 그리고, 모두 장발이다. 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머리를 몇달 기른 뒤 광주에 투입되었으며, 시민군과 국군 비슷하게 위장하였다고 증언한다. 5.18측은 저들의 복장에 대하여 무어라고 설명하는가? 5.18측 설명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저들을 5.18불순세력이라고 불러야 한다. 시민군 전체가 불순세력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시민군 중에 불순세력이 끼어 있었다는 징후이다.
위 동영상에서 힌츠페터의 영상물을 보는바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검문소에서 "우리는 광주에서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광주에 도착하기 직전 그는 타지역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로 들어가는 5.18사기꾼들을 만나 첫단추부터 거짓말에 세뇌되었다. 한국말은커녕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광주사태에 대한 지식이라곤 .18사기꾼들에게서 배운 거짓말밖에 없었던 그가 광주사태에 가장 정통한 "푸른눈의 목격자"서 한국에서 절대적 명성을 누려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상물에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아주 중대한 단서가 있다.
힌츠페터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취재하기는커녕 공수부대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몇 구의 시체를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5.18사기꾼들은 이 영상물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들을 죽인 살인마라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이 영상물을 방영하야 왔었다. 그 5.18비디오의 이 장면이 문민독재정권 시절의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사태에 아는 전부였으나, 그는 모 기자가 보여주는 이 장면만 보고 성급히 판단하여 12.12특별법이라는 꼼수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어 감옥에 보낼 궁리를 했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살인마 누명을 씌우는 자들은 이 영상물이 그 증거라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지성인이나 문명인이 할 주장인가? 오늘(2008년 12월 18일) 남상국 전(前)사장 유족이 노무현에게 사과 없으면 내일 고소하겠다고 말했을 때 노무현의 어록과 남상국 사장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의 근거가 분명하다. 그러나, 도대체 1980년 5월 21일 새벽 광주역 인근의 총기사고로 죽은 이 영상물의 인물과 당시 대법원에서 진행되던 김재규 재판 관련 업무로 여념이 없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도대체 무슨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아래 사진의 인물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영상물과 그 사진을 유일한 근거로서 제시해 왔으나, 만약 이 영상물과 그 사진으로만 판단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이분을 살해한 자들은 5.18불순세력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자, 여기에 그 단서가 있다. 그 다음날 도청 점령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5월 20일 타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해 오던 5.18무장단체 중 한 명이 그 다음날 새벽 죽었는데, 다름아닌 힌츠페터의 카메라에 잡힌 인물이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머리에 총상으로 죽었다. 그리고 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죽었다고 증언하며 보여주는 인물 역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바로 옆에서 총에 맞았으며, 총상으로 보아 분명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 우리 육안으로 동일인물인지 판별하기는 어려우나 만약 5.18측 주장대로 이 영상물만을 근거로 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동일인물이요, 따라서 가해자는 5.18불순세력이었다.
자, 사고일시는 21일 이른 새벽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주변에는 군인이 단 한명도 없었으며, 유일한 무장단체도 시민군이었다. 그 당시 7공수와 11공수는 도청광장에 갇혀 겹겹이 시민군에 포위당하고 있었으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남대 임시본부로 복귀한 3공수 부대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던 때였다. 더구나, 실탄도 그때는 시민군 편에만 있었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포용 실탄이 지급된 때는 도청광장과 전남대에서 시민군 장갑차 공격을 받기 시작했던 정오 무렵이었으며, 위에 언급된 광주역 인근에서의 총기 사고 때는 공수부대원 그 누구에게도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던 때였으며, 거리상으로도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총상으로 보아도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
그리고, 어째서 시민군 편에서는 아무런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실로 이상하지 아니한가. 힌츠페터는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겠지만 영상 속의 이분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그 노래는 전우애에 대한 노래요, 군가였다. 가사 소리가 분명하지 않지만 "...맺어진 전우야...해가 질적에" 등의 가사가 들린다. 그런데 힌츠페터가 관찰한 정황대로라면 이분은 바로 자기 옆의 전우가 쏜 총에 얼굴 옆을 맞았다. 여기에 힌츠페터로서도 도저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이상스러움이 있다. 만약 시위 중 사건이었다면 어째서 목격자가 없는가? 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사망한 인물이라고 확인해 주는 이분과 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사망한 인물이라며 보여주는 이 사진의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이 청년은 시민군 전우의 총에 맞았으며, 시민군 전우는 이 사실을 은폐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더구나 시민군의 전우애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중상자를 엠블런스에 실어 병원에 후송하지 않고 트럭에 실어 광주 전지역을 돌며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는가? 보통의 경우 총에 맞아도 사람은 즉사하지 않으며, 몇시간 동안은 응급실에 후송될 기회가 있다. 그런데, 시민군 사격술이 얼마나 좋길래 한 방에 머리를 쏘아 즉사시켰으며, 왜 병원으로 후송하지 아니하였는가? 중상자를 수레에 실어 도시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그 시신을 보여주는 것이 참으로 자기 가족을, 자기 친구와 전우를 사랑하는 길이겠는가? 5.18시민군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쿠바의 도시 게릴라 방법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1958년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이 바로 그런 방법으로 일어났었던 것이다. 50년전의 쿠바는 미국과 교역하며 생활 수준이 높은 풍요로운 나라였다. 그래도 반미, 반정부 시위를 할 이유가 있었던 공산주의자 대학생들이 있었으며, 사실 그 수는 처음에는 적었다. 그런데, 어느날 대규모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서장이 자기방어를 위해 뽑아든 권총에 운동권 리더 한명이 죽었다. 시위대는 그 청년의 관을 메고 도시를 한바퀴 돌았는데, 군중심리에 의해 그 경찰서장은 공공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쿠바 시민이 들고 일어나 폭동이 일어났다. 그 기세를 타 카스트로가 시민군을 조직하였고,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 방법 앞에 정부군이 무너지므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쿠바는 붕괴되고, 이후 장장 50년 지속된 카스트로의 천하가 되었던 것이다. 미련한 한국좌익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쿠바에서의 그런 공산주의 혁명이 민주화운동이었겠지만 쿠바는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쿠바 국민은 자유를 상실한 백성이 되지 아니하였던가!
위 사진을 보라! 몇 사람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글씨로 "시체수백"이라고 쓴 현수막을 트럭 위에 걸고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선동하지 아니하는가! 물론, 죽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 무장시민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시민군 2~3명이 총기사고를 당한 사고 발생 여러 시간 전에 이미 시민군은 순경 4명을 버스로 깔아죽였다. 물론, 죽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 5월 19일 공수부대원 한명을 돌로 머리를 짓이겨 죽였으며, 20일 새벽에는 3공수 정관철 중사를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으며, 20일 오후에는 3공수 16대대 운전병을 버스로 깔아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죽였다. 그러나 그 수를 다 합해도 열을 크게 넘지는 않았을 터인데, "시체수백"이라고 쓴 현수막을 차에 달고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다니는 광경이 아래 동영상 시작 후 20초부터 10초간 보인다.
미국에서는 흉악범도 경찰을 살해하지는 않는다. 수십 수백 명의 깡패 조직이 서로 칼과 흉기를 들고 패싸움을 하다가도 순경 두 명만 나타나면 모두 줄행랑친다. 아무리 간이 큰 갱단 두독이라도 감히 순경에게 대들 생각을 못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순경들을 버스로 깔아죽이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인가? 21일 새벽의 두세명의 시민군 총기사건에 대해서도 먼저 목격자를 확보하며 중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순서였음에도 트럭에 실어 광주 전지역을 돌아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어째서 5월 20일에 3만명의 무장시민군을 포함하여 20만명이 넘는 시민이 도청 광장에 집결하였느냐는 질문과 맞물려 있다.
광주사태 발생 원인에 대한 잘못된 설명 중 하나가 김대중 석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에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5월 19일까지 내각 총사퇴하지 않으면 그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못한다면 최후통첩을 보냈던 김대중은 건재하였으며, 아직 감옥에 가지 않았다. 5월 22일은 김대중은 전국적 민중봉기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김대중이 내각을 새로 임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다. 가히 김대중 가문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분으로서 당시 김대중 내란 수사를 맡았던 이기동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자, 그렇다면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인가? 김대중이 연행되었기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이 5월 22일 전국적 민중봉기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했던 내란 음모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단지, 광주 등 16개 도시에 국한해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뿐이지 그 거사계획은 5월 18일 이전에 이미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주동자들이 5월 21일 도청광장 앞에서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니 어서 가서 총맞으라며 도청광장에 사람들을 불러모았던 것이 아니다. 주동자들 편에서는 5월 21일에 도청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시민을 선동했던 것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시민군 선무반이 "시민은 도청으로!" "전시민 도청으로!" 등의 구호가 박힌 현수막을 걸고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선동하였다는 것은 시민 동원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 논리가 "시민이 많이 모이면 도청앞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니 어서 도청앞으로 모이자!"였겠는가? 혹은 그런 선동이 시민은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겠는가?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동자들의 과제는 어떻게 수십 만명이 도청광장에 집결하도록 선동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을 동시에 수송하느냐였다. 택시 한 대에 4명씩 승차하여도 20만명 이상이 동시에 동원되려면 5만대 이상의 택시가 있어야 한다. 주동자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위 사진에서 보듯이 주동자들은 탈취한 군용트럭들을 동원하였다. 5월 21일 새벽 원인 모를 시민군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과 그때 이미 상당히 많은 군용 트럭 및 시민군 운전병들이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였는가? 김대중의 전국연합측에서는 5월 21일 전남도청 광장에 수십 만명을 집결시킬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시민을 선동하는가?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 때처럼 몇구의 시체가 군중 동원의 촉매 역할을 했다. 따라서 주동자들 편에서는 분명 그날 이른 아침의 불가사의한 사건은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건이었다. 지난 여름의 광우사태 때도 김대중 진영에서는 의도적으로 시위대 부상자가 생기도록 시위환경을 조성했다는 문건이 발견되지 않았던가.
광주사태 주동자는 윤상원으로 대표되었던바, 당시 광주 전역에 대자보로 게시되었던 아래 문건을 보면 그날의 사건들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미리 짜여진 마스터 플랜에 따라 진행된 사건이었으며, 그 목표는 전국적 민중봉기였다.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5월 22일 발행한 위의 투사회보 2호 중 상반부를 필사하면 아래와 같다:
<<투사회보 2
민주투사들이여! 더욱 더 힘을 내자!!
승리의 날은 오고야 만다.
광주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그 성x성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 승리의 날까지 전 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의 만세를 부르자!
ㅇ "KBS방송국을 접수하여 각지에 방송을 통해 이 참상을 알리자.
ㅇ 외각도로 차단 (서울 목포 화순 송정 남전 기타)
ㅇ 차량임무분담을 표시하자. (지휘부, 연락부, 보급, 구급, 기타)
ㅇ 인근지역에 나가 투사를 규합하자. >>
5월 21일 낮 12시까지 도청광장에 무장시민군 3만명 포함한 2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모였을 때 모두가 무장봉기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시체 유언비어와 선무방송에 잠시 선동되었을 뿐이요, 무료로 도청광장까지 차로 실어다 주니깐 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동자측에서는 달성 목표가 있었으며, 그 목표가 투사회보로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면 시민군 편에서 그런 필요가 절실하였을 때 발생한 몇명의 시민군 의문사 사건에 대해 어느 측에 책임이 있으며, 어느 편에 의혹의 시선이 집중되어야 하는가? 사고발생 당시 사고발생 지역에서의 유일한 총기무장단체는 5.18무장단체였다. 그리고,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누명임은 전두환 김대중 두 인물의 전혀 대조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김대중같은 간웅도 자기가 데리고 있던 문세광을 사주하여 1974년 광복절에 암살하려 했던 대상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하물며, 대한민국 육사 출신 중에서도 가장 영웅호걸로 정평이 나있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무명의 이분을 상대로 작전지시를 하셨을리 있겠는가? 김대중과 전두환은 전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김대중은 배후 조종하는 인물이기에 정치9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두환의 리더십은 그런 리더십이 아니었다. 그는 작전지시할 때 언제나 선봉에서 뛰었다. 특전사 시절 그는 별을 달고 낙하시범을 보여주는 유일한 장성이었으며, 보병 사단장 시절 그는 모든 구보 훈련에서 항상 선봉에서 달리는 장군이셨다.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오신 적도 없으셨으며, 그 누구와도 광주사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신 바도 없다. 따라서 위의 영상물 청년의 살해범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주장은 지성인에게는 불가능하다. 12.12사태의 경우 당신이 한 당사자였음을 1980년 8월의 전역식 때 스스로밝히시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떤 역할을 주도하셨음을 훗날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으셨던가. 만일 광주사태 당시 폭동진압에 조금이라도 관여하신 바 있으셨다면 숨기실리가 있었겠으며, 정웅 소장, 소준열 장군 등 호남 출신으로서 광주향토사단 지휘관들이었던 분들이 입을 닫았을리가 있겠는가.
"전두환 살인마 처단" 주장은 본래 지성인들이 확보한 객관적 증거나 물증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었다. 광주시민 대다수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었고,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음에도 주동자들 편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구호를 내걸었던 이유는 도시 게릴라 방법을 위해서였다. 쿠바의 공산당 게릴라들이 썼던 방법대로 광주시민군을 무장봉기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증오심의 표적이 필요하였기에 전두환이란 이름을 이용하였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이제 더 이상 한 특정지역의 전유물, 어떤 특정 그룹 이해관계를 위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이다. 비록 힌츠페터가 광주에 도착한 날 "전남국을 만들자"는 구호가 광주역 인근 시민군들 사이에서 외쳐졌다 하더라도, 5.18 사건은 이제 한국근현대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객관적 증거를 지성하는 지성인들이 그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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