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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의 예지, 그 배경과 의의 본문

격감유록, 천부경, 송하비결, 정감록

탄허스님의 예지, 그 배경과 의의

천아1234 2021. 10. 4. 11:31

김성철(金星喆)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한글요약

 

선과 교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과 노장사상, 역사와 민족종교, 음양오행과 풍수지리 모두를 꿰뚫는 혜안을 갖춘 분이 있었다. 간산 탄허 스님이었다. 탄허 스님의 활동기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6년 박정희 피살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적 암흑기였기에 세인들은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도참적 발언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였다.

 

탄허 스님은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의 강한 영향 아래서 성장하였고, 면암 최익현 계통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스님의 예지에서 보이는 ‘진한 민족주의적 정서’는 이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와 지구의 변화에 대한 스님의 도참적 발언들은 주로 김일부의 『정역』에 근거한 것으로 많은 내용들이 그대로 실현되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었다. 스님의 도참사상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 세계의 변방에서 정치적 암흑기에 신음하던 우리 사회의 구성원을 향해 던진 희망의 메시지였다고 생각된다. 탄허 스님의 예지는 요컨대 ‘선의 가득한 당위의 미래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탄허, 도참, 미래학, 보천교, 최익현, 정역 

 

1. 한국의 정치적 암흑기에 풍미했던 탄허의 도참설 

 

老子는 말한다. “학문을 하면 나날이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덜어낸다.”1] 이런 통찰은 불교수행에도 적용 가능하다. 불교를 禪과 교敎로 나눌 때 선이 ‘나날이 번뇌를 씻는 수행’이라면 교는 ‘나날이 지식을 쌓는 공부’다. 교는 선을 위한 地圖이며 나침판이다. 禪敎兼修. 선과 교학을 함께 닦는다는 뜻이다. 가장 이상적인 불교 수행이지만 至難한 길이다. 평생을 참선 수행에 매진했던 철두철미한 선사이면서, 불교교학은 물론이고 사서삼경과 노장사상, 역사와 민족종교, 음양오행과 풍수지리를 모두 하나로 꿰뚫는 慧眼을 갖춘 분이 계셨다. 바로 艮山 呑虛(1913~1983) 스님이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사상사 2천년을 통틀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정신적 偉人’이었다. 

 

스물을 갓 넘어 출가하여 3년간 묵언정진하면서 참선을 시작한 이래 평생 선 수행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불전의 번역과 강설, 교육과 교화의 이타행을 시현하셨다. 스님의 수행에 대해서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2]

 

"자정에 일어나면 아침에 식사하실 때까지 꼭 참선을 하셨습니다. 일생을 했습니다. 그 선지의 경지라는 것은 헤아릴 수가 없어요. 선에 관한 모든 서적은 다 뒤졌고 당신이 실제로 그 경험을 했고, 㰡”화엄경㰡• 원고를 쓰시다가도 마치면 원고를 덮어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정진하시다가 다시 쓰셨습니다"

(서우담 선생). 

 

"스님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냐 하면, 일상삼매에 들어 계셨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어요. 예를 든다면 손님을 접대하시면서도 순간순간 놓치질 않고 자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계에 빠져서 생활하는데 스님의 경우 그런 일이 없었죠. 항상 자기 일에 동요가 없으셨죠"

(혜거 스님).  

 

1] 도덕경, 제48장, “學者日益 爲道者日損.”

2] BTN 홈페이지(2012.03.11.). 필자가 문어체로 윤문함. 

 

자정에서 동이 틀 때까지 매일 새벽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역시 참선과 삼매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傳言이다. 그야말로 一行三昧의 삶이었다. 이와 아울러 스님은 불교인재를 양성하고 한문불전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화엄경과 관련해서는 李通玄(635~730)의 新華嚴經論 40권을 비롯하여 총 287여권에 이르는 문헌들을 취합하여 현토, 번역, 주석하였다.

 

27세가 되던 해에 스승인 漢巖(1876~1951) 스님으로부터 신화엄경합론의 현토 간행을 부촉받은 후(1939), 44세에 번역에 착수하여(1956) 11년이 지난 55세가 되던 해에 완성하고(1967) 다시 8년이 지난 63세에 세상에 선을 보인(1973)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었다.

 

이 이외에 육조단경(1960), 보조법어(1963) 그리고 서장, 도서, 절요, 선요의 四集과 능엄경, 금강경, 기신론, 원각경의 四敎(1980), 치문과 초발심자경문(1981), 주역선해(1982) 등의 역주본을 속속 출간하였다.

 

노자의 도덕경(1983), 선종영가집(2001)과 발심삼론(2001), 그리고 장자의 남화경(2004)의 역주본은 스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간행되었다.3]

 

역주의 양과 깊이의 모든 면에서 가히 초인적인 작업이었다. 후학 양성을 위한 ‘願力의 이타행’이었다.

 

탄허 스님은 세속의 변화에 대해 깊이 통찰하면서 우리나라와 인류의 미래와 관련하여 많은 예언을 남겼다. 스님은 주역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金一夫(1826~1898)의 正易을 해석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고 지구의 지질학적 변화까지 예측하였다. 신라 말의 道詵(827~898)국사나 여말선초의 無學(1327~1405)대사의 예에서 보듯이 고승들에게 예언이나 도참은 餘技와 같았다. 탄허 스님의 경우도 그랬다. 그러나 세속의 길흉화복에 조바심치며 희로애락의 삶을 사는 일반대중들은 스님의 학문이나 禪旨보다 예언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스님 역시 당신의 예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그런데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 말인데, 6.25사변 같은 것이 언제 날까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을 道인 줄 알어. 그건 術家의 사상이야. 術客이 하는 짓이지. 道자리는 아는 것이 끊어진 것이 道지, 아는 것은 道가 아니에요."4] 

 

탄허 스님 스스로 6.25사변을 예언한 일화가 있고, 지구의 지질학적 변화를 예측하기도 했지만 이는 단지 術일 뿐이고 공부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이었다.5] 이어서 天眼, 天耳, 宿命, 他心, 神足, 漏盡의 六神通 가운데 漏盡通만이 도이고 나머지는 술에 불과하다는 설명이 계속되었다. 마술과 같은 신통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번뇌(漏)를 제거(盡)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본질, 종교생활의 본질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스님의 가르침을 기리고자 할 때 예언이나 도참설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은 스님의 그림자를 밟으려는 허황한 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명리를 추구하면서 세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이나 도에 대한 스님의 가르침보다는 예언과 도참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스님이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吐露한 미래에 대한 예언들은 불교계는 물론이고 정치와 문화, 종교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스님의 사상과 시대적, 사회적 역할을 정리하고자 할 때 스님이 發說하신 갖가지 예언과 도참설을 종합하여 그 근거를 밝히고 의의를 찾는 작업이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圖讖을 체계화한 인물은 도선국사라고 한다.6] 통일 신라 말 후삼국이 난립하던 혼란기에 활동했던 도선은 고려의 건국과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였고7] 그의 裨補風水 이론은 태조 왕건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8] 고려시대 내내 국사나 왕사로 불리면서 존숭되었다.9] 또 고려 시대 말에 李씨 성을 갖는 사람이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十八子得國’의 도참설이 퍼져 있었고10],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참서인 㰡”정감록㰡•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의 혼란기에 성립한 데서 보듯이,11]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거나 사회가 혼란할 때 예언, 秘記, 도참이 유행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와 삼척의 영은사 그리고 부산의 삼덕사 등에서 불전번역에 매진하다가 60세가 되던 1972년 서울 안암동의 대원암에 기거하면서12] 본격적인 교화활동에 나섰던 탄허 스님의 도참설이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역시 그런 정치적 격변기, 혼란기였다.

 

3]탄허스님 홈페이지(2012.03.11.)

4]김탄허(1980), p.88 ; 김탄허(2003), p.129. 

5]김탄허(1980), pp.88~90. 

6]양은용(1993), p.82. 

7]최병헌(1975), p.122. 

8]왕건은 훈요십조의 제2조에서 도선의 비보풍수 이론에 근거하여 사찰의 난립을 금한다. ‘이진삼 외(2010), pp.496~497’ 참조. 

9]최병헌(1975), p.125. 

10]양은용(1993), p.81. 

11]양은용(1993), p.86. 

12]장화수(1996), p.255.  

 

8.15해방 이후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면서 이승만(1875~1965) 정권이 들어섰지만, 1954년 속칭 ‘4사5입 개헌’을 통해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무제한 출마가 가능하게 하는 종신대통령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급기야 1960년에 3.15부정선거를 저지르자 젊은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은 종식을 고한다. 내각중심제의 개헌이 이루어지고 ‘장면 정권’이 탄생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1917~1979)와 김종필(1926~)이 주축이 되어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軍政 기간인 1962년 말 대통령중심제로 환원하는 개헌이 이루어졌고 1963년 10월에 선거가 치러졌는데 소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수반이었던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같은 해 12월에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임기 중반인 1969년에 ‘삼선개헌’을 단행하였고 197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이듬해인 1972년 10월17일 영구집권이 가능하도록 ‘유신헌법’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다.

 

탄허 스님이 월정사에서 서울의 대원암으로 주 근거지를 옮긴 시기는 바로 이때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종식을 고한 정치적 암흑기였다. 스님은 1972년 낙원동에 화엄학연구소를 설립하였고 한국의 학계와 관계,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미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을 토해내었다. 탄허의 도참설이었다.

 

1972년의 10월 유신 이후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 긴급조치, 위수령, 휴교령 등을 남발하였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이철, 유인태 사형선고. 1974년 4월 김지하 체포, 사형선고. 1975년, 㰡”思想界㰡•를 창간하고 운영하던 張俊河(1918~1975)의 의문의 추락사 …. 1979년 10월20일 부마항쟁.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피살.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쿠데타.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1981년 5월27일 서울대생 김태훈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도서관 6층에서 투신자살13]. 어둠이 깊을수록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저항은 더욱더 거세졌으며, 희생 또한 컸다. 

 

탄허 스님께서 서울에서의 교화를 시작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974년 1월에 초법적인 긴급초지 제1호가 선포되었고 불과 1년 후인 1975년 5월에 발표된 제9호까지 이어졌다.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4]

 

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②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③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④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⑤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⑥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⑦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이 가운데 제①항에서 말하는 ‘대한민국 헌법’이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의미한다. 누가 봐도 ‘소가 웃을 조항’이었지만, 당시의 정권은 이를 비판하던 많은 志士들의 싹을 잘랐다. 가히 초법적인, 초헌법적인 조치들이었다. 이런 조치들에 근거하여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지식인, 대학생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인민혁명당사건’이라고 날조되었던 ‘민청학련사건’의 경우 총 1,024명이 수사를 받았고 그 가운데 2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이 기소되었고 이철, 김지하, 유인태 등 14명이 사형선고를 언도받았고 21명이 무기징역형에 처해졌으며 그 외에 140명의 형량은 도합 1,650년에 달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가운데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의 여덟 명은 1975년 4월9일 대법원 상소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살인이었다.15] 

 

근대적 법치가 아니라 전근대적 人治, ‘동물적인 힘’이 지배하던 세월이었다. 냉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의 기치를 올리고 자행되었던 독재의 시대였다.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대학생들과 양심적이고 용감한 몇몇 지식인 이외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정치적 암흑기였다. 

 

13]이호령 외 편(2006).

14]고시면(2011), p.5.  

15]2005년 12월27일 재판부는 인혁당사건에 대한 재심을 받아들여 2007년 1월23일 무죄판결을 내렸다.  한겨레뉴스(2007.01.23). 

 

탄허 스님이 1972년 서울의 낙원동에 ‘화엄학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하화중생의 행보를 내디딘 후 1983년 열반하시기까지 10여 년은 군부독재의 정치적 폭력과 그에 대한 목숨 건 저항이 되풀이되는 군부통치의 암흑기였다. 탄허 스님은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말들을 쏟아내었다. “한반도의 국운이 융성해지며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 조국을 통일하고 국내외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위를 선양할 것이다.” “과거에 남의 나를 많이 침략한 일본의 대부분은 바다에 잠기고 핵무기를 갖는 강대국들이 곤경에 빠진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만주 땅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을 겁니다.” “맨주먹이 수소탄을 이긴다.” “우리나라에 金風이 불면, 즉 서방의 바람이 불면 미국의 도움으로 인류사의 열매를 맺고, 우리가 새로운 세계사를 시작한다.” 통일의 조짐이 보이기는커녕 남북대립이 극을 달리던 시대였는데, 한반도는 머지않아 통일된다는 희망의 싹을 심어 주었고, 초법적 정치권력의 동물적 힘이 지배하던 우리 사회였는데 도덕적 인물이 통치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월남전의 운명이나 일본의 미래에 대한 스님의 발언에서 보듯이 국제관계에서는 마치 드라마와 같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예측하였다. 

 

예언자, 도참가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람들. 기독교의 휴거 …. 사회가 온전할 때 지식인, 주류들은 이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가 암울해질 때 이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1972년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교화활동을 시작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사회의 언론매체, 지식인, 정치인들은 탄허스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74년 국방대학원 장화수 교수와의 대담16], 1975년 부처님 오신 날 동국대 김항배 교수와의 대담17], 1977년 월간중앙 신년호 부록에 실린 “현대의 고뇌를 종교에 묻는다.”는 제목의 좌담, 1978년 김지견 박사와의 대담19], 1977년 1월18, 19, 20일의 조선일보 선우휘 주필과의 3일 연속 대담20] 1980년 김지견 박사와 한국일보 대담21] 등을 통해 탄허 스님은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 사회, 우리나라의 미래가 희망적이라는 점을 力說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정치인들이 냉전의 대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곧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想像莫及의 발언으로 남북통일의 희망을 심어주었고, 5.16쿠데타 이후 12.12쿠데타를 거치며 20년 이상 이어져 온 독재정권의 酷政 아래서 젊은 청년들은 죽어가고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도덕을 갖춘 지도자가 세상을 통치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善意 가득한 희망의 예언으로 한국정치의 지향점을 제시했으며, 소련과 중국이 북에서 잡아끌고 미국과 일본이 남에서 잡아끄는 車裂刑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분단의 한반도’에서 ‘눈치 외교’에 급급할 때, 앞으로 한국이 세계를 이끄는 지도국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발언으로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다. 

 

탄허 스님의 예지가 빚어낸 도참적 발언들은, 구한말의 민족종교의 도참설이 그랬듯이 출구를 모르던 정치적 암흑기에 우리 사회의 한 편을 밝히던 희망의 등불이었고, 마치 신라 말의 도선과 고려 말의 무학이 그랬듯이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이었다. 탄허 스님의 예언들은 그 시대적 역할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16]장화수(1996), p.21.

17]김탄허(1980), p.131.  

18]김탄허(1980), p.221 ; 장화수(1996), p.250.  

19]김탄허(1980), p.122.  

20]김탄허(2000, 초판 1997), pp.85~129 ; 장화수(1996), p.250.  

21]김탄허(2000, 초판 1997), p.209.  

 

2. 탄허의 출가 전 학문적 履歷과 도참설의 근거 

 

양은용은 도참을 “왕조 장래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미래의 길흉화복을 징험하는 예언비기류를 총칭하는 말”이라고 정의하면서22] 그 어느 시대든 도참사상은 “군주나 지배층이 아닌, 풀뿌리처럼 짓밟혀 살면서도 내일을 내다보는 하찮은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는 인간애가 짙게 깔려 있는” ‘민중구제의 한 철학’이라고 평한다.23]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남북통일의 확신과 도덕정치의 비전이 담긴 탄허의 도참설에는 ‘하찮은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가 깊이 스며있었다. ‘하찮은 사람들’이란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사의 변방에서 고난을 겪어온 우리 민족이기도 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부독재에 신음하던 민초들이기도 했다. 

 

탄허 스님의 도참사상은 민족주의적이며, 낙관적이었는데, 스님의 가계와 출가하기 전 학문적, 종교적 이력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의 부친 栗齋 金洪奎 선생은 17세째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증산교의 일파인 普天敎의 교도였으며24] 항상 정치문제를 가지고 소년 시절의 스님을 가르쳤다고 한다.25]

 

보천교는 그 창시자인 車京錫(1880~1936)의 별칭을 써서 ‘車天子敎’라고도 불린다.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土의 자리인 중앙에 차천자가 황색 옷을 입었고, 사방에 이를 호위하는 네 사람을 두었는데 탄허 스님의 부친 김홍규 옹은 당시 보천교의 2인자로 동방인 木의 지위에 있었기에 청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26] 

 

탄허 스님은 이렇게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의 강한 영향 아래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6세 때부터 사서삼경 등 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장소 역시 보천교에 소속한 서당이었다.27] 그리고 17세가 되었을 때 기호학파인 면암 최익현(1833~1906)28] 계통의 학문을 전수받은 이극종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21세까지 시경 등의 삼경과 예기, 춘추좌전 등의 경서를 학습한다.29]  

 

주지하듯이 면암 최익현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내 머리를 잘라도 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며 저항한 인물이다. 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한 ‘晴討五賊疏(또는 請討五賊訴)’를 올렸으며, 74세의 노구로 1906년 의병을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된 후 대마도로 압송되었는데 감옥에 갇혀서 적국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다가 순국한 애국, 애족의 지사였다. 탄허 스님의 도참설 가운데 많은 내용들에 민족주의적 색체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출가하기 전 스님의 이러한 종교적, 학문적 이력과 유관할 것이다. 

 

22]양은용(1993), pp.80~81.

23]양은용(1993), p.93.  

24] 장화수(1996), p.254.  

25]김탄허(2000, 초판 1997), p.101.  

26]장화수(1996), p.254.  

27]장화수(1996), p.140.  

28] 탄허 스님은 최익현의 고손자인 최창규(1937~) 교수(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찾았고 필자는 두 분이 만나는 장소에 있었는데, 이 때 최창규 교수는 역학에서 말하는 “一徑爲三 一方爲四”(또는 “陽三陰四”)의 의미에 대해 여쭈었고, 탄허 스님은 즉각 “3은 하늘을 의미하고 4는 땅을 의미한다.”고 답하면서, 그 이유로는 ‘天圓地方’의 이치에서 동그라미(圓)의 경우 직경의 3배가 둘레가 되고, 네모(方)의 경우 직경의 4배가 둘레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 바 있다. 이는 㰡”京房易傳㰡•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근거한 것으로 짐작된다. “孔子曰 陽三陰四 位之正也 三者 東方之數 東方日之所出 又圓者 徑一而開三也 四者 西方之數 西方日之所 又方者 徑一而取四也.” 29]장화수(1996), p.254. 

 

증산교를 포함한 한국 신종교의 개벽사상의 공통점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든다. 

 

 

“첫째 우주론적 변화로서의 개벽의 도래를 강조한다. 둘째 서구의 천년왕국 신앙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서구의 그것과 달리 순환론 내지는 원환론적 성격을 갖는다. 셋째 기존의 낡은 사회질서들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확립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넷째 강한 민족주체의식이 내재되어 있어서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서는 한민족이 세계 역사를 주도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한국은 종주국이 될 것이며, 후천선경이라는 이상 세계도 한국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30] 

 

이 네 가지 특징은 탄허 스님의 도참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선친의 종교였던 증산교 계통의 보천교31]와 정감록32] 그리고 김일부의 정역 등 구한말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신종교나 전통적 도참사상 등이 그 원천이었다.

 

증산교에는 종파도 많지만33] 각 종파에서 의지하는 성전도 다양한데 1974년에 安雲山(1922~1912)이 설립하고 安耕田이 종정으로 있는 ‘甑山道’는 탄허 스님의 부친이 소속되었던 보천교, 즉 차천자교를 계승한 종단이라고 자처한다. ‘증산도’에서 의지하는 성전은 道典이다. 증산도 측의 설명에 의하면 2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 끝에 1992년에 도전의 초판이 발간되었고 11년이 지난 2003년 완결본이 간행되었다고 한다.34] 탄허 스님의 예언 가운데 핵심적인 것 몇 가지와 유사한 내용을 도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의 동남해안 쪽 100리의 땅이 피해를 입을 것인데 그러나 우리의 영토는 서부해안 쪽으로 약 2배 이상의 땅이 융기해서 늘어날 것입니다.”35] “한반도의 동해안도 해일과 지진으로 일부가 바다 밑에 침몰하게 되지만, 반면 서해안의 경우 황해 바다의 거의 대부분이 육지로 솟아나게 됩니다. 지구의 가장 근접한 축에서 이러할 때 세계 각처에서는 동쪽이 가라앉고, 서쪽은 크게 올라오는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36] 이는 일반적인 ‘미래학’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지질학적 예언’인데 도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세상이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살 수가 없사오니 속히 개벽을 하시어 수효를 덜게 하옵소서.”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로부터 南通萬里라 하였나니, 장차 우리가 살 땅이 새로 나오리니 안심하라. 符命 하나로 산을 옮길 것이니, 이 뒤에는 산을 옮겨서 西海를 개척할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중국과 우리나라가 하나로 붙어 버린다.” 하시고 “장차 동양삼국이 육지가 되리라.” 하시니라."37]

 

앞에 인용했던 탄허 스님의 예언과 같이 후천세계가 되면 서해안이 융기하여 땅이 넓어지면서 한반도가 중국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탄허 스님 역시 만주와 요동의 일부가 우리 영토로 귀속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8] 

 

30]노길명(2008), pp.198~199.

31]장화수(1996), p.227.  

32]㰡”정감록㰡•을 다 믿느냐는 조갑제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스님은 “맞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지요. 㰡”정감록㰡•의 필자는 국가나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여 경고하고 예언한 게 아닙니다. …”라고 답한 바 있다. ‘김탄허(2000, 초판 1997), p.175’ 참조. 

33]보천교, 태을교, 증산교 문공신파, 보화교, 도리원파, 중산대도회, 미륵불교, 증산선불교, 증산법종교, 용화교, 태극도, 증산도,  대순진리회 ….

34]증산도 홈페이지(2012.02.25) 

35]김탄허(1980), p.169. 

36]장화수(1996), p.71. 

37]증산도 道典 웹문서(2012.02.26), 7편 18장 1절. 

38]장화수(1996), p.89. 

 

또, 탄허 스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자. “한반도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국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살아 왔으며 역사적으로 빈곤, 역경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우리가 이 正易 시대에 태어났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적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모든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국위를 선양할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모든 국가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또 스님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유불선이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천지의 허무한 기운을 받아 선도로 포태하고, 천지의 적멸한 기운을 받아 불도로 양생하고, 천지의 以詔42] 기운을 받아서 유도로 목욕하고 띠를 두르리라.”는 강증산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43] 이 문장 역시 증산도의 㰡”도전㰡•에 그대로 실려 있다.44] 장화수 교수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평소에 보천교를 창시한 차경석을 높게 평가하면서 “조금만 서양의 근대적인 지식이나 당시의 국제정세에 눈을 떴더라면, 한국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대종교가와 민중의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영웅이었”고 “日帝가 말살한 보천교는 사교집단이 아니라 利財를 할 줄 몰라서 몰락한 것”이라고 술회하셨다고 한다.45] 탄허 스님은 강증산의 가르침 역시 수용하여 도참설의 자료로 활용하였다.

 

탄허 스님의 도참설의 결정적 근거이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헌이 㰡”正易㰡•일 것이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고 하던가. 19세기말 서세동점의 혼란기에 한반도에서는 위대한 종교인, 사상가들이 속출하였다. 동학의 최제우(1824~1864), 증산교의 강일순(1871~1909), 원불교의 소태산 박중빈(1891~1943) …. <”정역>•을 저술한 김일부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1826년 충남 논산군 양촌면에서 태어난 一夫 金恒은 36세가 되었을 때, 낙향한 관리인 李雲圭(1809~?)를 찾아가 역학을 연구한다. 최제우 역시 김일부와 同學이었다.46] 그 후 54세가 되던 1879년에 갑자기 눈앞에 낯선 卦圖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나면서 온 천지에 가득 찰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正易팔괘’였다. 처음에는 심신이 쇠약하여 보이는 헛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건강에 신경을 썼으나 소용이 없었는데 <”주역>•을 읽다가 「說卦傳」의 “神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47]라는 구절과 그에 이어지는 “물(水)과 불(火)은 서로 영향을 주고, 우뢰(雷)와 바람(風)은 서로 거스르지 않으며, 산(山)과 연못(澤)이 기운을 통한 다음에야 능히 변화하여 이미 만물을 이루느니라.”48]라는 구절을 보고서 눈앞에 떠돌던 괘도의 의미를 확연히 알게 되어서 괘도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다시 3년에 걸쳐서 㰡”정역㰡•을 저술하였다고 한다.49] 역학에서는 河圖를 정리한 ‘伏羲팔괘’와 洛書를 정리한 ‘文王팔괘’에 의해서 세상을 해석한다. ‘복희팔괘’가 하늘(乾)과 땅(坤)이 벌어지고, 해(離)와 달(坎)이 운행하는 천문현상을 나타낸다면, ‘문왕팔괘’는 봄(震), 여름(離), 가을(兌), 겨울(坎)로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복희팔괘를 先天易, 문왕팔괘를 後天易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천개벽이 일어난 다음의 세계를 예고하는 정역팔괘가 나타나면서 정역팔괘가 후천역이 되고, 문왕팔괘는 선천역으로 되었다. 복희팔괘와 문왕팔괘, 그리고 한반도에서 새롭게 나타난 김일부의 정역팔괘는 다음과 같다.

복희팔괘는 天道를 주로 밝히고, 문왕팔괘는 人道를 밝혔으며, 정역팔괘는 地道를 밝힌 것이라고 한다.50] 천도란 日月星辰의 변화를 의미하기에 복희팔괘는 일종의 天文圖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乾, 天)과 땅(坤, 地)이 벌어지고 해(離, 火)와 달(坎, 水)이 움직이는 천문기상을 축약한 도안이다. 이와 달리 문왕팔괘는 갈등과 투쟁 속에 살아가는 인人間事를 밝힌 것이다.

 

39]김탄허(1980), p.169.

40] 증산도 㰡”도전㰡•, 7편 83장 7,8.  

41] 강증산은 김일부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김일부를 만나기 위해서 連山을 찾아가 3일간을 머무는데 이 때 두세 시간 정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일부는 73세 강증산은 28세 때의 일이다. 따라서 상기한 강증산의 발언은 김일부의 㰡”정역㰡•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윤종빈(2009), p.34’ 참조. 

42]원문은 ‘이적’이나 이는 오타이다.  

43]김탄허(2000, 초판 1997), p.167.  

44] “受天地虛無하여 仙之胞胎하고 受天地寂滅하여 佛之養生하고 受天地以詔하여 儒之浴帶라.” 증산도 道典, 2편 150장 3절 ; 10편  106장 4절. 

45]장화수(1996), pp.227~228.  

46] 이정호(1988), p.108.  

47]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48] “故水火相逮, 雷風不相悖, 山澤通氣, 然後能變化旣成萬物也.”  

49]이정호(1988), pp.106~110.  

50]김탄허(1982), p.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