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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진실 출처: 딴지일보

천아1234 2021. 10. 10. 11:35

2021년 6월 24일. 창간 26년 된 홍콩의 『빈과일보(蘋果日報)』가 폐간했다. 평소 8만 부 발행하는 신문은 이날 1백만 부를 발행했다. 며칠 사이 편집국장과 주필이 체포되고, 회사 자산이 동결되는 등 더 이상의 경영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1천여 명의 실업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홍콩의 유력 인터넷 신문인 Stand News(立場新聞)는 “사과가 사라진 홍콩” 그리고 “빨간 선이 모든 홍콩인에게 닥쳤다”는 제목을 달았다. 특별히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1면에 중국어로 “친구, 사과,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게”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관련한 내용은 차차 다루기로 한다)

 

홍콩 시민들이 몇 시간을 기다려 폐간하는 홍콩 신문 빈과일보의 마지막 호를 사고 있다. / 출처-<AP 연합뉴스>

 

내게 홍콩은 홍콩의 밤거리라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상상의 도시였다. 리샤오룽(李小龍)이라는 희대의 영화배우가 사는 동네였다. 영화 속에서 악당이 먼저 흉기를 들고나오면, 리샤오룽은 마지못해 쌍절곤으로 대응하곤 했다. 하지만 일단 꺼내면 악당이 후회해도 소용없을 만큼 응징했다.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고 암울했던 고교 시절 우리들 가방에는 쌍절곤이 들어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나쁜 놈들을 응징하겠다는 일념으로 점심시간 때 연습 삼아 친구들을 향해 휘둘렀다. 언젠가는 가보리라 하던 그 ‘상상의 공동체’ 홍콩은 의외로 빨리 내 앞에 나타났다. 

 

중문과에 입학하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애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등의 책을 접하면서 나는 중국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에 마오쩌둥이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막연하게 그를 동경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깃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무조건 정의를 위해서 투쟁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면서 그에 관한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물론 이후 그의 자세한 행적을 알게 되면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역사에 대한 확신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 시절 어느 날, 나는 친구로부터 대륙에서 발행되는 책을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사회주의의 날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리는 듯한 낭보 중의 낭보였다. 그렇게 해서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에 ‘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원단 ‘불온서적’이 내 책상 앞에 놓이게 되었다. 

 

홍콩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홍콩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유학지로 홍콩을 선택한 것도 내 지적 호기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역사를 가른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홍콩은 조용해졌다 

 

2014년 우산 시위(우산 혁명)

 

2014년 ‘우산 시위’에 이어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로 홍콩은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우산 시위’의 목표는 홍콩의 수장인 행정장관을 내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는 보통선거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송환법 반대 시위’의 목표는 어떠한 이유로도 중국으로 송환되어서 재판받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2014년 79일간의 ‘우산 시위’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는 부담감은 더욱 격렬한 ‘송환법 반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

 

송환법 반대 시위대는 하나도 양보할 수 없다며 아래와 같은 5대 요구를 내걸었다. 

 

 1. 송환법(범죄인 인도협정) 공식 철회

 2.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3.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것 철회

 4. 체포된 시위 참가자에 대한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5.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시위의 결과는 정부로부터 송환법의 폐기 선언만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시위는 할 수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고, 곧이어 중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을 발표했다. 

 

홍콩의 분리와 전복을 기도하는 모든 활동을 처벌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중국 정부가 준비해온 마지막 카드였다. 이로써 하나의 국가, 두 가지 제도를 의미하는 ‘일국양제’나 주권 반환 이후 50년 동안 홍콩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깨졌다고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홍콩의 역사는 2020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을 발표한 날이다. 

 

이 법에 따르면 홍콩인은 물론 세계인은 잠재적인 국가 전복 세력이다. 누구라도 홍콩을 함부로 들먹인다면 체포할 수 있다. 그날 이후 홍콩에서 정치적 시위는 사라졌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조차 홍콩인들은 조용하다.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시위가 영구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2018년 홍콩에서 내 책이 출판되었다. 그 전부터 홍콩에서 심심치 않게 납치 등의 사건들이 일어난 터라 나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 책은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했다. 민감한 시기에 홍콩의 정체성을 다룬 책이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홍콩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외국인 학자가 홍콩에 관한 책을 냈다는 것부터가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홍콩에는 ‘홍콩역사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4백만 년의 역사를 연대기별로 정리해놓은 박물관이다. 세계 어느 박물관에 가든지 보통 각 해당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과 의식에 따라 각각에 맞는 스토리텔링이 되어있다. 나는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분석했다.

 

나는 내 책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서술한 학술서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던가. 게다가 홍콩이나 중국의 당국이 출판계는 물론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모든 신경을 쏟고 있을 시점이었다.

 

내 책에서 나는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 주체가 홍콩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을 밝혔다. 즉 홍콩인이 만든 박물관이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박물관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홍콩의 정체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중국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었다. 나는 책에서 홍콩의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중국-홍콩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이 정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봐야 그거야 당국에서 만들기 나름 아닌가. 책 내용 중에서 한 줄을 떼어내어 시선이 의심스럽다고 하면?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고, 홍콩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홍콩의 독립을 선동했다고 하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책이 나온 이후 나는 언행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홍콩의 몇몇 매체들로부터 들어오는 인터뷰 요청도 모두 완곡하게 거절했다. 

 

홍콩의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을 때면, 그 1-2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닌 경우보다 빨리 지나간다고 했던가. 입국심사대에서 스탬프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지루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홍콩은 물론 중국으로 들어갈 때, 나올 때도 똑같이 긴장했는데, 심사대 앞에서 나는 홍콩에서의 내 종적을 되새기고 있었다. 심사대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홍콩에서의 활동에 대해 촘촘한 자기 검열을 진행했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돌아다녔지? 그때 실언한 적은? 아니 진심을 담은 말은 한 적이 없던가? 앗, 몇 해 전 명보(明報, 지식인들이 많이 보는 홍콩 중립지)에 홍콩과 한국의 시위문화를 비교한 내 글이 실린 적이 있었지, 아니 그 전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면서 막연하게나마 홍콩 지지를 표명한 적도 있구나, 나도 체포될 수 있고 조사받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하지? 우선 한국영사관에 연락해 달라고 해야겠지, 영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해야겠지!”

 

입국심사대에서의 대기시간 외 평소에도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진행했다. 

 

“나는 홍콩을 지지하나? 중국을 지지하나? 평소 내가 만나던 친구들의 성향은? 내 책에서 무엇을 주장했지? 혹시 홍콩독립에 긍정적인 서술을 한 곳은 없겠지? 아니야 그래도 외국인 학자인 내가 홍콩을 위해서 한마디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 검열을 진행하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외국인인 내가 이렇게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데 홍콩인들이 느낄 압박감은 말해 무엇하리.”

 

홍콩의 세미나에 불려갈 때마다 나는 홍콩 친구들의 무언의 간절한 눈빛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말해다오, 네가 대신 말해다오, 우리 홍콩의 처지를, 우리 너무 답답해,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너는 외국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왜 불렀겠나!” 

 

홍콩의 역사 관련 논문 발표회장에 참석한 일반 손님들의 한숨과 탄식 소리는 영원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홍콩에서 ‘외국 세력과의 결탁’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홍콩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지금 외국 세력과 결탁을 하고 있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곧이어 실제 그런 죄명으로 줄줄이 체포되고 기소되고 있는 활동가들과 정치인들을 보게 되었다. ‘외국 세력과의 결탁’은 이제 중국 정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경고성 수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을 공격하고 홍콩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을 향한 경고에서 빠지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실제로 홍콩에서 인문학 관련 세미나가 사라진 지 오래 이고, 홍콩의 정체성 관련 책의 출판이 뜸해졌다. 매번 방학 때 가서 작은 서점들을 순례하면서 홍콩의 다름을 주장하는 책을 찾아내던 행복은 이제 더 이상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홍콩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기소된 빈과일보 사주 지미 라이 넥스트디지털 회장. 라이 회장은 외국 세력과 결탁해 국가 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현재 수감 중이다.

 

원래 홍콩은 정보의 천국이었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세계의 정보가 넘쳐나는 어쩌면 각국이 가장 많은 정보원을 파견하는 곳이기도 했다. 양안삼지(대륙, 홍콩, 대만)는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원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홍콩의 기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이 중국에서 조사를 받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과 대만의 의원이나 학자가 홍콩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거나 조사를 받는 일도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효과는 엄청났다. 

 

도심의 장기적인 시위로 세계의 주목을 받던 홍콩이 매우 조용하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골치 아픈 홍콩을 납작하게 만든 신의 한 수였고, 홍콩의 입장에서 보면 한 방에 홍콩을 죽인 통한의 한 수였다. 

 

중국의 체제 안정을 지키는 법인데, 반대로 홍콩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2019년 송환법을 반대하기 위해 시작된 홍콩의 정체성 시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 홍콩에서 어떤 형태의 정치적인 시위도 일어날 수 없다고 예단한다. 

 

홍콩의 역사를 1840년 아편전쟁부터 친다면, 2020년 6월 국가보안법 이전과 이후로 다시 한번 더 나누어진다. 가장 큰 충격으로 기록될 것이다. (2020년 7월 1일부터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본격적인 홍콩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1. 역사란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말을 쉽게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고,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왜곡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과연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역사에서 ‘정곡’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바로’ 세우기는 가능한 것일까? 

 

 

갖은 상념을 한끝에 나는 나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을 바로잡기 전에 반드시 충분하게 알아야 한다.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 우선 논의의 장이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방어권이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진실 – 그것이 있다면 - 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선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가령 아래와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 

 

히틀러는 괴물이다. 하지만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모두가 나폴레옹이 전쟁 영웅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진정한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킬링필드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을까? 아니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왜 수백만 명을 살해했을까? 스탈린은 왜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을까? 아니 이주시켜야 했을까? 

 

정말 대원군과 고종과 민비가 잘못해서 조선이 망한 것일까? 그들이 잘했다면 조선은 계속 유지됐을까?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마오쩌둥과 사인방에게만 물어야 할까?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는 것일까? 

 

문화대학명 당시 마오쩌둥 옆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인방. 시계방향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흑백사진),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이들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런 문제의식의 기초 위에서, 모든 논의가 자유롭게 허용될 때 역사는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의 정체성을 인식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숙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한국은 이렇다’고 일언지하에 결론 내릴 수 없는 것처럼 홍콩 또한 단정할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것을 잡았다고 하는 순간 대상은 더욱 멀리 가버린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소수처럼 다루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다. 현재의 티베트, 신장, 내몽고 등을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인정해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은 있으나 말은 할 수 없다. 일단 지금은 그렇다. 개인이나 지역이나 국가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할 때 불행하다.

 

내가 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아편전쟁 이후 홍콩에 그리고 중국-홍콩 체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 

 

 

2. 역사에서 배워야 할 가르침 : 역사는 갈등과 모순의 결과물

 

한번 터진 질문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청나라 말기 정부는 망할 짓만 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만주족의 청나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가? 아편전쟁의 뇌관이었던 아편으로 인한 상황이 정말 극도로 심각했나? 난징조약은 정말 불평등조약일까? 이때 평등과 불평등은 누가 무슨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중국 정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1997년의 주권 반환이지만, 주권은 중국으로 반환되어야만 했을까? 주권이 반환되는 것이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홍콩을 그대로 두었다면 중국에 손해였을까? 

 

나는 평소 이런 점이 궁금하고 답답했다. 

 

돌이켜보면 19세기부터 중국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사람들은 성공이냐 실패냐 또는 선이냐 악이냐 즉 이분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리고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결론은 과정보다 더 회자된다. 그 결론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오지만 사실 그 논쟁 역시 이분법의 테두리 속에 있을 뿐이다.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독자들 모두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거는 무엇일까? 정답으로 보이는 교과서의 내용도 진영논리도 수시로 호출되는 동원 대기조에 불과하다. 

 

개인사나 국가의 역사가 단순 성공이었냐 실패였냐는 시각은 모두 잘 못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진실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결과에 도달하게 된 과정에 있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얽히는 ‘갈등’과 창과 방패의 ‘모순’이 중층적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결과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갈등과 모순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진정한 가르침이다.

 

19세기 중국의 모습

 

세계적으로 보면 19세기는 변화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세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의 기운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그런 느낌말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 개인도 국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편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쟁점을 정리하면, 우리는 역사에서 진정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홍콩 역사의 쟁점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불편한 진실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왜 양자 모두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하는지?’ 

 

를 알게 될 것이다. 

 

전술했던 것을 정리하면,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식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었다. 그동안 홍콩을 둘러싸고 전개된 역사적인 이슈에 내 나름대로 딴지를 걸고 싶었다. 이것이 본 기사 시리즈의 목표이다. 어쩌면 나와 딴지일보의 만남은 예비 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 이제 홍콩 이야기를 시작한다.

홍콩과 애국주의 역사학 ‘아편전쟁 담론’

 

홍콩섬은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아편전쟁 이전까진 인구 8천 명 정도의 ‘애매한’ 어촌이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권이 미치긴 했지만, 어민과 해적들이 공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홍콩섬을 영국이 주목했다. 지금 동남아시아 지도나 세계지도를 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홍콩섬과 주룽반도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우선 홍콩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이다. 동시에 태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나아가서 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의 해운을 연결하는 더 이상의 좋은 요충지가 없을 만큼 완벽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광동성의 젓줄인 주강(珠江)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 내륙으로 진출도 쉽다. 게다가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시진핑 주석의 핵심 정책인 세계를 하나의 띠와 하나의 길로 연결하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홍콩섬은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항구이다. 그래서 홍콩은 옛날부터 바다를 오가는 세계인들에게 생필품을 보급하는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홍콩이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나 각종 교과서에는 아편전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서술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뒷부분에서 좀 더 다루겠다)

 

홍콩을 알기 위해선 아편전쟁을 알아야 한다. 홍콩을 말하며 아편전쟁을 피해갈 순 없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에 대해 개요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략적이지만 일반적이다. 

 

중국은 물론 홍콩, 심지어 한국의 중국학계에서도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담론이다. 이른바 ‘애국주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가해와 피해라는 틀로 근대사를 재단한다. 그것의 중심에 아편전쟁이 있고, 중국은 아편전쟁의 철저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중국이 철저한 피해자가 되어야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구한 완벽한 구세주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근대사는 오늘과 직결되어 있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가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의 개요는,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1. 청(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의 주요 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2. 영국의 차 수입량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영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 영국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청에 인도산 아편의 (밀)수출을 허가했다.

4. 이후 영국의 대중국 무역은 균형을 회복했다. 청나라 재정의 30%가 아편을 구입하는데 소비되었다.

5. 청나라 전역에 아편 중독자가 창궐하여 온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마비되었다.

6. 도광제는 호광총독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아편 처리에 전권을 부여했다.

7. 1839년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 각국의 무역상인을 체포하여 앞으로 아편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8. 영국은 반발했고,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1840년 영국은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중국이 패배했다. 그리고 난징 부근의 영국 함상에서 두 나라는 조약을 맺었다. 

 

 

『난징 조약』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을 개방한다.

3. 전비 배상금과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을 영국에 지불한다.

4. 공행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5. 이 조약은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대등한 교섭의 결과이다.

 

특별히 ‘대등한 교섭의 결과’라는 조항을 두었다. 승자인 영국이 후환을 의식을 했다는 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지금까지 이 『난징 조약』을 불평등 조약이라고 원망하고 있다.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었다면, 근대식 무기와 장비 부족이 그 일차적 원인이었다. 지금도 중국 정부가 사활을 걸고 군비 증강에 나서는 이유다.   

 

『난징 조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홍콩섬’을 ‘할양’한다는 것이다. 

 

국토의 일부를 다른 나라에게 주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단한 굴욕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할양(割讓)’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할(割)해서 양(讓)한다는 즉 ‘떼어서 남에게 넘겨준다’는 뜻이다. 당시 청나라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영구히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홍콩섬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우린 배웠다. 당시 중국 정부가 볼 때, 홍콩섬은 너무 멀고 관리하기도 힘든 섬이었다. 떼어주어도 크게 애석할 것 없는 섬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자.

 

1840년에 시작된 이 2년간의 전쟁은 아편 때문에 촉발된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난징 조약』의 내용을 보자. 아편 시장을 개방한다는 조항은 없다. 영국이 정말 (중국이) 아편시장을 봉쇄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면, 『난징 조약』의 내용에는 아편시장 개방에 관한 조항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국 측은 중국의 5개 항구의 개방과 독점 상인 등을 폐지하는 요구를 했고, 관철시켰다. 원래 영국의 목표가 아편 판매에 있지 않고 통상에 있다는 뜻이다. 아편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 하여 그 전쟁을 굳이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편’이라는 ‘부도덕한’ 물질을 부각시켜 도덕적인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영국을 비난하기 위해서다.

 

외국을 파렴치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정부와 정당이 자주 사용하는 정치 행위 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아편전쟁’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외국과의 이해관계가 부닥칠 때마다 그들을 향해 다시 ‘아편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꾸짖는다.  

 

난징조약문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애매한 땅

 

홍콩은 아편전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대륙의 교과서에도 홍콩의 교과서에도 물론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이라... 아메리카 대륙이나 어느 별자리가 누구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말처럼 하릴없이 들리는 말도 드물다. 태고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 가당치나 한 것인가? 홍콩을 포함한 주룽반도와 주변 섬들은 ‘역사’에서 소외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남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중국이 통일되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의 홍콩부터 말해보자. 

 

홍콩은 중국 남부와 함께 월나라의 영토였다. 월나라의 영토는 중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멀고 사람이 살기 너무 더운 오랑캐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월나라의 남쪽에 있다 하여 베트남의 명칭이 ‘월남’이 되었다)  

 

이후 홍콩지역은 수많은 경계의 변화를 겪다가,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의 행정구역인 남해군(南海郡) 번우현(番禺縣)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이 통일된 이후로 여러 왕조에서 홍콩 지역은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귀양 보내기 좋은 멀고 먼 유배지였다. 내 손에 피 묻히기 싫을 때 쓰는 그 방법은 효과가 탁월하여 가는 도중에 세상을 뜨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홍콩 지역은 ‘중원’에서 볼 때 너무나 먼 곳이었다.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땅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기엔 너무 멀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까운 그런 지역이었다.  영국에 할양할 때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땅’ 하나 떼어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중국의 역대 조정은 중원에서 먼 변방지역은 크게 중요한 곳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만도 청나라에 편입된 게 겨우 300년 전이다. 홍콩이나 대만의 가치를 알았다면, 진작에 홍콩이나 대만을 관리했을 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홍콩의 지리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홍콩을 표현할 때 줄곧 ‘애매한 신세’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속 등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뜻이다.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지역 사람들

 

예로부터 해안 지역은 중앙조정에서 볼 때 골치 아픈 곳이었다. 수시로 해외로 도망가거나 밀수 혹은 해적질을 하는 유랑자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수시로 해안 통제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마침내 명나라는 해안선 4키로 내에는 주민이 살아서는 안 되는 ‘해금(海禁) 정책’을 채택하였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여 아예 그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이 해금 정책은 명초에 제정되어 17세기까지 3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해금정책을 실시한 ‘홍무제’

 

하지만 위에서 정책을 마련하면, 아래는 대책을 마련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이다. 강력한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뿐만 아니라 큰돈을 벌기 위해 해외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해적이 바다에서 어민을 습격하거나 내륙으로 들어와서 한 마을 전체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해적들은 한때 일본인이 다수를 점유하기도 했지만, 지역적 혈통적 정체성이 매우 복잡하여 점점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는 농민이고 어민이지만, 체제 밖에서는 이곳저곳을 떠돌던 유민이었다. 밀무역을 하기도하고, 바다 길잡이 역할도 하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국적을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중국 대륙, 대만,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 열도, 류큐(오키나와) 등지의 출신으로서 이익만 생긴다면 이곳저곳을 다니는 자유인이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그들 모두가 ‘왜구’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특정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있던 대만을 수복한 정성공(鄭成功)이나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무역을 활성화 시켰다는 장보고를 그들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한다. 정성공이나 장보고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논쟁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해당 국가들은 어떤 인물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인물을 미화하기도 한다.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킨 정성공은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알려진 장보고는 정말 한반도인일까? 장보고는 산동인들이 자랑하는 장보자(張保仔)와 다른 사람일까? 하나하나 따져보면 의문은 끝이 없다. 

 

홍콩 지역의 사람들 또한 줄곧 체제 안팎을 넘나들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섬을 포함한 광동 연해가 영국의 감독 하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정체불명의 사람들(해적, 유민 등)은 내륙 수로로 쫓겨 들어갔다. 이들 때문에 광동과 광서지방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홍콩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홍콩의 처지가 홍콩섬에 살던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같았다. 

 

 

아편전쟁의 진실

 

아편으로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었는가?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 그 전쟁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홍콩의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앞에서 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근절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고, 임칙서는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몰수하여 석회와 섞은 뒤 바다에 버렸다고 했다. (아편은 석회와 소금에 반응하면 못 쓰게 된다. 물에 빠진 아편을 건져 올려봤자 쓰지 못하게 한 조치였다)  

 

임칙서

 

바다에 아편을 버리는 임칙서

 

임칙서는 아편을 매우 싫어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편 등의 마약류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천양지차를 보인다. 당시에도 아편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인식은 너무나 달랐다. 위정자들이 아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대처는 다르게 된다.

 

신중한 황제는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 몇 번씩이나 지방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원래 시원한 결론은 얻기가 힘들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임칙서가 평소 아편 금지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황제에게 끊임없이 아편 근절을 주장했다는 점을 우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황제가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도록 몰아갔다.

 

통계 수치를 보면, 당시 청나라 전체 인구 4억 명 중 아편 흡연자는 1백만 명이 되지 않았다. 임칙서는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구국의 절대 영웅으로 신격화되었다. 중국과 영국의 담판 단계에서도 그는 범인 인도와 아편 금지 등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담판을 끝내 결렬시켰다. 전권대신으로서 그는 이후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간신히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평화는 그렇게 깨졌다. 아편은 변화의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19세기 청나라 광동지역의 아편을 피우고 있는 중국인들.

 

문제의식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다. 문제의식을 가지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 갇혀 버릴 수 있다. 확신을 가지는 순간 진실은 저만큼 달아난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는 평생의 화두가 될 만하다. 

 

영어 오피엄(OPIUM)의 음역이 분명한 아편은 양귀비라는 식물의 덜 익은 열매에서 뽑아낸 진액을 건조시켜 만든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은 군 위생병 출신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군에서 많이 보았던 아편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만 가지고 나왔더라도 이후 진통제는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던 사람도 그 시커먼 덩어리를 한 번만 핥으면 금방 헤헤하고 웃는다는 말도 했다. 부엌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흉기도 되고 이기도 되는 것처럼, 예로부터 아편은 마약이기도 하고 약재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편은 중국의 상류층에서는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해온 약재였다. 아편은 13세기경 중국에 전해졌고, 17세기경부터 그것을 흡연하기 시작했다. 

 

확산세가 커지자 18세기에는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뒤이어 영국이라는 변수가 하나 더 보태졌다. 

 

영국이 대량의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인 인도에서 대량 재배된 아편의 소비처로 인구 대국인 중국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중국과의 주거래 품목으로 아편을 선택한 것은 역사적 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영국을 포함한 외세는 통상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인도 지역에서 무더기로 재배되는 아편

 

 

아편전쟁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들 

 

언제나 그러하듯 학설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우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아편으로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는가? 아니면 위기인 것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세력들(외국과 통상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던가? 

 

청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떠올려야 한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세력도 지금의 정부도 모두 한족이다. 1911년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孫文, 혹은 쑨원)은 만주족의 청 정부를 철천지원수로 이해하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손문 (혹은 ‘쑨원’)

 

물론 지금도 당시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주도 세력은 한족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족의 땅임을 주장하는 그들은 만주족인 청나라의 무능과 부패를 최대한 부각시켰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다음 문제로는, 

 

전쟁이라는 초강경책을 채택해야만 했던가? 현상 유지라는 온건책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던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유지되고 있는 체제나 질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의 두뇌는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로부터 늘 도발당하고 있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지금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 현상은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노력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혁명보다 더 큰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평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에는 사람들의 기억력과 인내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피해를 생각해보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전쟁의 피해자는 말단 병사들이거나 무고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중 함락된 포대와 청군 시신들.

 

청 황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신하와 저 신하의 의견이 다르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도 책임자에 따라 다르다. 청 당시 지방정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사실을 보고 하기보다는 지방관리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증명서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이후 아편전쟁 기간 중에도 연전연패하면서도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올릴 정도로 시스템은 이미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1911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세워진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고 나중에 다시 황제를 칭한 원세개(袁世凱, 혹은 ‘위안스카이’)는 이런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은 정확한 정보를 위해 특사를 파견하는 방법을 썼다. 

 

우선 한 명을 파견해서 상황을 듣고, 다시 한 명을 더 파견한다. 두 명의 의견이 일치할 경우는 그대로 믿었다. 아닐 경우 다시 한 명을 더 파견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아편과 관련하여 최고 책임자인 황제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아편은 나쁜 것인가? 아편 때문에 정말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말인가? 그래도 지방경제에 활력을 가져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이 보고서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일까?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로서의 보고일까?  

 

이 팽팽한 긴장을 깰 것인가? 아쉬운 대로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편을 허용하면서 평화를 얻을 것인가? 아편을 불허하고 자존심을 얻을 것인가?

 

한번 시작된 질문은 끊임이 없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강경파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강경책은 늘 자존심과 연결된다. 통상을 반대하고 아편 확산을 막는 것이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되면, 이제 누구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역사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

  

 

동아시아인들의 ‘중국 근대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중국 경제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중국 또는 중국공산당의 논리다.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로 만들고 반드시 구국의 영웅을 등장시키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다. 물론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낭만주의적 서사 방식을 기조로 한다.

 

서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말했지만, ‘애국주의 역사학’의 틀을 말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 지금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아편전쟁 스토리를 말해본다.

 

백성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그것을 사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여 국부(은)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아편 중독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여 나라가 망해갔다. 보다 못한 임칙서(林則徐)라는 지방 총독이 황제를 설득하여 드디어 민족의 자존심 찾기에 나섰다. 

 

임칙서의 동상은 중국 각지에서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편이라는 마약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나라의 돈(은)이 유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임칙서라는 ‘애국자’가 나섰다.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흠차대신 임칙서는 광저우로 내려가 거래되는 아편을 몰수하고 폐기 처분했다.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영국 의회가 상인들의 요구에 역사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을 승인했다고 비판했다. 찬성 271표, 반대 262표였다. 간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된 것을 보면, 영국의 정치인 그들 자신도 전쟁의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의 조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무기로 침략자 영국에게 맞섰지만 분패를 했다. 

 

영국 측은 5백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에 중국 측은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일방적인 전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중국인 나아가서 동아시아인들이 쓰는 중국 근대사를 완전하게 지배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의 가치를 몰랐던 대가는 혹독했다

  

영국과의 전쟁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약 20년 뒤, 1856년부터 전개된 2차 아편전쟁은 더욱 참혹했다. 1차 아편전쟁에서 이미 청 제국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협상이 가능했던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 간 1차 아편전쟁이 두고두고 아쉬운 이유이다.

 

 

『난징 조약』의 결과는 중국이나 영국 모두에게 불만이었다. 청은 아편 (밀)수입량이 증대되는 것과 점점 확대 심화되고 있는 기독교 전도 등에 불만이었다. 

 

반면 영국은 생각한 것처럼 상품수출이 증대되지도 않고 베이징에 외교공관을 개설하지 못한 점 그리고 선교의 자유도 확보하지 못한 점에 불만이었다. 조약 개정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영국에게 기회가 왔다. 

 

영국인 소유의 선박인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해적 혐의로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강제로 내리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국 국기를 모독했다는 것이 새로운 전쟁의 이유였다.

 

애로호 사건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기독교라는 서구를 상징하는 종교이다. 

 

서구의 종교인 기독교가 중국의 질서와 전통 사상 체계를 한꺼번에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는 초기부터 매우 조심스럽게 대응해왔다. 교황청을 비롯한 서구 기독교 세력은 완전한 전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해 왔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간에 한 번쯤 심사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긴장해서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풀 수 없는 고리가 분명히 있다. 이후 전개된 태평천국 등 일련의 국내 동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에 기독교 전도를 목표로 삼는 학생이 있다면, 중국과 근대사와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라고 내가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차 아편전쟁은 1차 아편전쟁보다 훨씬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영불(영국, 프랑스) 양국은 톈진(天津)을 점령하여 기독교 전도의 자유와 북부의 항구 개항 등이 약속된 『톈진 조약(1858)』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비준과정이 여의치 않자 영불은 다시 베이징을 공격하였다. 

 

청나라 시절 원명원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을 야만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한 것도 이때였다. 1860년에 톈진 개항과 홍콩 주룽(九龍)반도 할양 등의 혁혁한 전과를 확인하는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도 이 조약에 상당하는 대우를 요구하여 헤이룽장 이북의 영토와 연해주 지방을 할양받았다. 

 

한 번 노출된 약점과 손상된 권위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두고두고 이용당했다. 대대로 간신히 유지되어 오는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종이 호랑이라고 공인된 대국의 몰락은 의외로 매우 빨랐고, 타의에 의한 근대화는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은 외세에 대해 천추의 한을 품게 되었다. 

 

 

홍콩섬과 주룽반도 그리고 신계(新界) 지역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홍콩을 구성하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자 안전을 구실로 더 많은 땅을 요구했다. 『홍콩 경계 확대 조약』을 통해 지금 홍콩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하는 면적을 빌렸다. 99년 동안 임대하는 것으로, 기한은 1997년 6월 30일까지 였다.   

영국의 패배, 중국으로 ‘주권 반환’

 

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 무려 155년 동안이었다. 중국으로 반환된 건 1997년이었지만, 이에 관한 협상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중국과의 긴 협상 기간 동안 영국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순차적으로 했다.

 

①홍콩의 주권을 반환하는 협상이니만큼, 당사자인 홍콩의 대표도 포함시켜 3자 회담으로 하자.

②홍콩섬과 주룽반도는 청나라로부터 영구적으로 할양받은 영토이기에 협상 대상이 아니다.

③신계 지역만이라도 조차 기간을 연장하고 싶다. 

④홍콩을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로 독립시키는 것이 양국의 이익에 부합된다.

⑤주권은 중국에 반환하더라도, 일정 기간 경영권을 행사하고 싶다.

 

1982년, 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

 

모든 제안을 거절당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최종 결정자는 덩샤오핑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응했다.  

 

①원래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기 때문에, 홍콩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고, 당연히 3자 회담은 성립될 수 없다.   

②홍콩섬과 주룽반도의 할양은, ‘난징조약’이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③99년간 빌려준 신계는 기한이 만료되었으니 반환해라.

④중국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항간에서는 덩샤오핑의 기가 대처 수상을 꺾었다고 말한다. 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 수상이 회담을 한 다음 날, 홍콩의 모든 신문 1면에 대처 수상의 사진이 실렸다. 그녀가 회담을 끝내고 인민대회당을 나오던 중 계단에서 실족하는 장면이었다.

 

1997년 7월 1일 밤 12시, 홍콩의 컨벤션센터,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는 ‘주권 반환 의식’이 열렸다. 150여 년의 시간이 정리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역사의 한순간이었다. 중국 대표인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감회가 복받치는 듯한, 영국의 대표인 찰스 왕세자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홍콩 반환식. 악수하는 장쩌민 주석과 찰스 왕세자.

 

홍콩 반환식 당일 행사. 찰스 왕세자(왼)와 크리스 패튼 총독(오)

 

홍콩의 마지막 총독으로, 임기 동안 영국을 위해서든 홍콩을 위해서든 간에 역대급으로 많은 것을 민주화한 패튼 총독은 그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 홍콩에게 그는 특별했다. 

 

홍콩 반환식에서 울고 있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는 크리스 패튼. 패튼 부인의 얼굴도 보인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홍콩 조야에는 홍콩의 마지막 총독으로 영국의 수상보다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마지막 총독은 영국 정계의 거물 패튼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결심했다.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그는 자신의 다짐을 나타내고자 역대 총독과는 다르게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지 않았고, 총독의 제복도 입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모든 제안을 거절당한 영국은 막판으로 몰렸다. 이제 남은 것은 홍콩의 민주화라는 카드였다. 마지막 총독 패튼은 정치 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입법의회 직선 의원 수를 대폭으로 늘렸다. 지역의회 의원 선거도 직선으로 돌렸다. 

 

홍콩중국인을 국무총리와 재무부 장관 자리에 처음으로 기용한 것도 그였다. 재임 기간 내내 중요한 발표가 이어졌다. 홍콩의 민주화 그것이야말로 영국의 이익을 영원히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중국 정부는 ‘천고의 죄인’이라며 패튼의 홍콩 민주화 작업을 비난했다. 패튼은 자신이 뿌린 민주의 씨앗이 씩씩하게 자라나서 홍콩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대륙을 뒤흔들 것이라는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중국 정부가 홍콩의 민주화라는 대세는 막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원래 홍콩인은 영국부속영토시민(BDTC, British Dependent Territories Citizen)의 신분이었다. 영국 연방의 시민으로서 영국 영사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패튼은 떠나면서 홍콩의 중산층 5만 명에게 영국해외시민(BNO, British National Overseas)의 자격을 주었다. 영구적으로 영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이다. 

 

왼쪽이 BNO여권. 오른쪽이 영국시민권자의 여권.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캡처.

 

‘언제라도 영국에 올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다오’라는 주문이었다. 홍콩의 엘리트 계급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중국이라는 새로운 힘을 견제하고 홍콩의 민주화를 견인해 줄 것을 기대했다.  

 

패튼 그리고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홍콩 민주화 작업은 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주판은 영국의 계산기를 능가했다.

 

 

정체성 충돌과 해법이 연재의 목표이다

  

전술했듯 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155년’ 동안 영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식민지였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열다섯 번도 더 지나간 세월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나, 아직까진 분명히 홍콩은 남다른 정체성이 있고, 그것은 그 15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이나 지역이나 국가의 정체성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을 연구하는? 정치적인 성향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일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정체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관계를 정체성의 관계라고 본다. 사람과 사람, 이념과 이념, 종교와 종교는 물론이고, 지역과 지역, 국가와 지역, 국가와 국가의 갈등은 정체성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국가와 지역과 이념이라는 정체성에 관심이 있다. 또 정체성의 충돌에 관심이 많다. 나아가서 그것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한다. 알다시피 최근까지 홍콩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행진. / 출처-<BBC>

 

나는 그것을 홍콩과 중국, 중국과 홍콩의 ‘정체성의 갈등’이라 생각한다. 즉 각기 다른 두 개의 정체성이 만난 것이다. 그것은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쉽게 해결될 것이었다면 시위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격렬하게 전개되었겠는가.

 

우습지만 사석에서 가끔 누구 편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 지금부터 내가 ‘친홍콩’의 입장에서 말해 볼게, 끝난 다음 다시 ‘친중국’의 입장에서 말해볼게, 듣고 나서 내가 누구 편인지 자네가 판단해보게!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는 본 시리즈에서 ‘친홍콩’ 또는 ‘친영국’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친중국’이 될 것이다. 각 기사마다 평가를 안 받을 순 없겠지만, 내가 어떤 입장인지, 누구 편인지에 대한 확정된 평가는 여러분이 본 시리즈를 다 읽고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본 시리즈에서 ‘중국과 홍콩이라는 정체성이 왜 충돌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그 해법을 알아보는 것이 이 - 홍콩의 진실에 대하여 - 연재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입장을 전달할 것이기에 시리즈 중간에 일어날 수 있는 독자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본 시리즈의 목표를 우선 밝혀둔다.

 

 

97년 ‘주권 반환’에 대한 홍콩인들의 비유

 

다시 돌아와서, 홍콩은 식민자인 영국이 만들었다. 영국이 온전히 자신의 철학과 의지대로 식민지를 경영한 결과물이 홍콩이다. 누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할 것이고, 누구는 그것을 실패라고 할 것이다. 누구는 근본적으로 잘못 태어난 홍콩이기에 홍콩의 모든 성과는 헛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누구는 주인이 누구이든지 거주민 즉, 홍콩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냐 안 하냐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네 인생처럼 홍콩 사람들도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155년 뒤인 1997년 소속이, 국가가 바뀐 것이다. 

 

1990년대 홍콩.

 

본 시리즈를 읽는 독자들께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홍콩을 강의할 때마다 서두에서 하는 말이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이 반환될 때, ‘홍콩사람들’이 자주 동원하던 비유였다. 본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이 화두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

 

(중국) 아버지 : 애비가 돌아왔단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제 이 애비가 다 챙겨줄게!

 

(홍콩) 자식: 155년 동안 나를 안 찾았잖아요. 아버지 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아버지라고, 우리는 아버지 필요 없어요.

 

한때 중국과 홍콩 사이 단어 하나 가지고도 신경전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영국 정부는 반드시 주권 ‘이양’이라고, 중국 정부는 꼭 ‘반환’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느끼듯이 ‘이양’이라는 말에는 안 주어도 될 것을 준다는 생색이 숨어 있다. 

 

반면 ‘반환’에는 받을 것을 받는다는 당당함이 드러난다. 아무튼 1997년에 중국 정부는 홍콩의 주권을 당당하게 ‘반환’ 받았고, 지금은 ‘반환’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알다시피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은 많은 식민지를 경영했고, 홍콩은 그중 하나였다. 그냥 평범한 식민지 중의 하나였다면, 즉 식민자에 의해 착취당하다가 독립한 식민지 중의 하나였다면 이처럼 주목받지 않았을 것이다. 

 

홍콩은 아름답게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름답고, 반짝인다는,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살아가기에 장사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의미도 더해졌을 것이다. 오욕의 역사에 의해 탄생된 식민지를 ‘동양의 진주’라고 부르다니 이것도 가당치 않은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내가 홍콩에 가기 전부터 가진 의문이었다. 

 

 

내가 생각한 홍콩과 달랐다

 

1980년대 후반 나는 홍콩으로 유학을 갔다. 1984년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게 ‘반환’한다는 『중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몇 년 뒤였다. 홍콩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법』 제정을 두고 양국 간 치열하게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홍콩사람들이 ‘이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1980년대의 홍콩.

 

홍콩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쉼 없이 나의 뇌리를 자극하는 놀이였고 실험이었다. 

 

“너는 영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영국의 통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조국인 중국으로 반환되는 건 기쁜 일 아닌가?”

 

등의 질문은 나를 만나는 모든 홍콩 친구들이 감당해야 하는 숙제였다. 

 

홍콩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가 기대했던 것은 영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타도 분위기였다.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로 곧 폭발할 것 같은 민심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놈들이 어떤 놈들인가 말이다. 2차 아편전쟁 때 청나라를 향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그 아름다운 원명원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약탈한 놈들이다. 저희들의 욕심 때문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들었던 여름 궁전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든 놈들임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한갓 해적 같은 놈들 때문에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이것이 홍콩에 처음 도착하기 전부터 한동안 가지고 있던 내 정서였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민족과 민주라는 화두에 휩싸인 교정에서 보낸 세월이 어디 하루 이틀이더란 말인가. 하지만 처음 마주한 홍콩인들이나 내내 경험한 홍콩인들은 영국에 대한 분노는커녕, 오히려 영국의 통치를 받는 자신들이 곧 영국인인 것처럼 자부심이 터질듯했다. 그 자부심의 크기에 반비례하며, 홍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난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의문이 들었다. 영국놈들이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 다음에 얻은 땅에서 살고 있는 홍콩중국인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사람들을 이렇게 ‘타락시킨’ 동력이 무엇일까. 이들은 정말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아는 배부른 ‘돼지’들인가?

전쟁과 번영

 

1차 아편전쟁 이후 60년 만에 홍콩 인구는 50배 증가했다. 중국 대륙 바로 옆에 ‘다른 나라’인 영국이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힘센 나라였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나라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지역은 피난지로서 최고다. 게다가 영국 지배하의 홍콩은 ‘도착정책(Touch Base Policy)’을 취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홍콩에 들어오면 홍콩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서양 열강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시작점이었던 아편전쟁은 전통적인 중국의 사회구조를 단번에 흔들었다. 광동연해가 영국 해군의 관할 하에 들어감으로써 이곳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내륙 수로로 쫓겨 들어갔고, 그 여파로 운수업에 종사하던 대량의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당연하게도 혼란 속에서 상호부조나 종교적인 비밀결사들이 번성했다. 

 

아편전쟁 즈음 청나라의 인구는 4억 정도로 증가하였으나, 행정조직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삶은 피폐해졌고, 결과적으로 태평천국 운동(1850년-64년) 같은 동란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은 홍콩섬을 점령하고 있던 1841년에 이미 자유무역항을 선포하였다. 향후 그들의 야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19세기 중반에 자유항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홍콩은 일찍이 누구나 오고 갈 수 있는 자유항이 되었다. 

 

게다가 무관세 정책이었다. 중계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수출입의 관세가 없다면 상품의 가격은 저렴해지고 거래는 활발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유통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세상만사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이다.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곳이 있으면 전쟁의 특수 덕분에 번영을 구가하는 곳도 있다. 사회 혼란은 언제나 인근 지역(국가)의 경제 활성화를 가져왔다. 

 

일본이 한국전쟁의 덕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한국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닦았듯이, 홍콩은 식민지 초기부터 중국 대륙 내의 전쟁 덕분에 인력과 자본이 몰려들었다. 

 

(1960년대에 홍콩은 베트남 전쟁의 특수 덕으로 다시 한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홍콩뿐만이 아니고 조계지도 마찬가지였다. 조계지란 중국의 영토에서 외국인이 행정, 경찰, 사법 등을 관할하는 지역으로서, 1845년에 상해에서 영국이 처음으로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조계지는 지조(地租)만을 중국에 지불할 뿐 사실은 중국의 땅이 아니었다. 상해의 조계지는 중국의 각종 동란으로부터 안전하였고, 자본이 집중되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국제조계지 황푸강변 와이탄의 풍경.

 

조계지는 청나라가 청일전쟁(1894년)에서 패배한 이후 급증하였다. 영국, 일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중국의 28개 지역에 조계지를 확보할 만큼 확대되었다. 당연히 해당국의 직접투자가 가능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역업과 은행업에 투자하면서 생산에도 뛰어들어, 중국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를 확대해 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을 포함하여 조차지와 조계지는 중국 근대사의 치부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세력에 대한 중국의 경계심과 피해 의식도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자주 제기된다. 

 

 

식민 초기의 홍콩

 

홍콩의 인구는 1842년 초에 이미 2만 명까지 늘어났다. 재판소, 우체국, 토지 등기소, 감옥 같은 정부 건물과 더불어 부두, 창고, 상점, 환락가, 도박장 등의 상업 시설이 들어섰다. 1845년에 홍콩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은 이미 그 규모에 놀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홍콩은 밀수와 합법이 공존하는 중계항으로서 중국의 차, 비단, 도자기, 설탕, 염료 등이 해외로 나갔고, 해외에서는 양모, 의류, 금속, 인도의 원면 등이 들어왔다. 물론 아편은 여전히 밀수의 중심에 있었다. 1840년부터 20년 동안 아편으로 벌어들인 영국의 순이익은 6배 성장하였다.

 

1865년 홍콩 거리.

 

1890년 홍콩 거리.

 

19세기 홍콩에는 아편 밀무역을 하는 기업도 많았는데, 많은 선박은 물론 호위 함대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자딘 그룹은 한때 아편 밀수의 상징이었다. 아무튼 활발한 중계 무역 덕분에 개항 20년 만에 외국 상사 70개가 들어왔다. 

 

해적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844년에는 해적 1백 50명이 홍콩섬 해변의 창고를 약탈한 적도 있다. 심지어 해적 선단이 항만의 동서 양쪽을 막아서 홍콩과 중국 간의 무역이 마비되기도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1차 아편전쟁의 결과에 중국과 영국 모두 불만이었다. 2차 전쟁의 조짐은 끊이지 않았다. 영국군이 광저우를 포격하기도 하고, 홍콩의 중국인이 영국 포병단의 식사에 독을 타기도, 센트럴 시장에 방화를 하기도 그리고 영국군이 해적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1849년에는 마카오 총독이 암살되자, 홍콩에는 광동성 당국이 홍콩 총독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동남아 각지에서 식민지 당국에 항의하는 소요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2차 아편전쟁 기간(1856-1860) 동안 홍콩의 인심도 나날이 흉흉해졌다. 황제를 대신하여 광동성과 광서성(현 광시성)을 다스리는 양광 총독은 중국인은 백인을 돕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백인들의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홍콩과 광저우의 가두에는 영국 오랑캐를 살해하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라는 내용의 전단지가 나붙기도 했다. 

 

광저우에서 외국 무역관이 불타고, 외국 선박이 포로가 되는 일들이 있었고, 홍콩에서는 외국계 기업이 습격당하고, 공무원이 하인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1857년에는 비상을 섞은 빵에 총독 부인을 비롯한 수백 명의 유럽인들이 중독되기도 했다.   

 

 

자유를 찾아 홍콩으로 몰려온 중국인들

 

홍콩으로, 홍콩으로, 피난민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11년 중화민국 건국, 1920년대는 군벌 전쟁, 1930년대는 항일전쟁 등 중국 대륙을 뒤흔드는 사건에 백성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홍콩으로 이어졌다. 1937년 말에 홍콩 인구는 이미 1백만 명을 돌파했다. 

 

1937년 8월 전쟁이 상하이까지 덮쳤다. 일본군은 황푸강 연안과 부두를 점령하고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짐을 짊어진 중국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 출처-<북폴리오>

 

결정적으로 피난민이 몰려온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일본의 통치로 일시 감소하였던 홍콩의 인구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을 피해서 몰려오는 피난민으로 다시 폭증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홍콩의 인구가 180만 명이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다음 해인 1950년에는 다시 230만 명으로 증가했다. 5년 만에 170만 명이 늘어난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를 하는 마오쩌둥.

 

우리는 언제나 억압받지 않는, 꿈과 능력이 무한대로 인정되고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을 꿈꾼다. 홍콩은 전쟁을 피해서, 사회주의가 싫어서 오는 피난민들에게 이상적인 공간을 제공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면서 탈출한 사람들에게 홍콩은 자유 그 자체였다.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육상으로 해상으로 넘어왔다.  

 

인구 유입은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주거, 교육, 취업, 의료 등의 문제를 수반한다. 좁은 홍콩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구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기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 처음으로 중국-홍콩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중국과 홍콩의 경계선이 생겼다. 이때부터 홍콩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1950대 말부터는 대륙에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자연재해로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 등이 야기한 정치적 박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피신을 했다. 대륙에서 벌어진 부르주아지 숙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들은 홍콩으로 탈출을 했기에 목숨을 건졌다. 

 

1950년부터 20년 동안 90만 명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느슨해진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유입되는 인구가 다시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1980년에는 홍콩의 인구가 5백만 명이 넘었다. 홍콩을 ‘피난민의 도시’라고 하는 이유이다. 

 

1980년대 홍콩 거리

 

홍콩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언제 어디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꼭 등장한다. 철책을 넘어서 육로로, 또 헤엄쳐서 해로로 건너왔다고 한다. 무슨 책이든 저자의 이력에도 대륙으로부터의 탈출 경력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월남했다는 것과 똑같은 이력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책 한 권만큼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전쟁을 피해서,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서 홍콩의 ‘자유’를 찾아왔다는 스토리는 홍콩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대륙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홍콩으로 피난 온 이 170만 명의 엘리트들은 향후 홍콩 ‘발전’의 주역을 담당했다.     

 

 

‘과객’으로서의 홍콩인

 

1984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게 반환한다는 『중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84년 중영공동성명

 

“홍콩이 주권이 중국 아니 중국공산당에게 반환된다고? 그것이 결정되었다고?” 

 

주가와 집값이 폭락했다.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홍콩인들은 다시 피난을 생각했다. 

 

“대륙에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당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지주계급이라고 인민재판에서 변명 한마디 못하고 바로 총살당했어!”

 

“우리 아버지는 친구에게 솔직하게 한마디 했는데, 우파로 지목되어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어!” 

 

“문화대혁명 때 나는 그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고 공개 선언해야 했다고!”

 

“엄마가 집에 와서 울면서 불평하자 내 동생이 엄마를 밀고해서 엄마는 고문받다가 돌아가셨다고!”

 

“내가 어떻게 탈출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주권 반환은 대륙을 탈출한 홍콩 사람들의 상처와 공포를 다시 건드렸다. 당시 나는 홍콩의 지인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공산당이 온다고, 공산당이”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홍위병들은 일명 ‘반혁명분자’들을 대중 앞에서 조리 돌림하며  모욕 주고 폭행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홍콩사람들의 정체성을 요약할 때 지나가는 손님 즉 ‘과객(過客)’이라고 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과객’은 책임이 없다. 내가 그곳에 영원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과객 심리’를 홍콩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꼽는 학자가 많다. 

 

다시 한번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1997년 주권 반환을 앞둔 그즈음 홍콩 사회의 화두는 단연 해외 이민이었다. 홍콩의 내 친구들은 모두 이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캐나다와 호주의 대사관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최근에는 홍콩과 동병상련의 처지인 대만 그리고 홍콩에 대한 영원한 책임을 강조하는 영국 정부가 홍콩인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987년에 3만 명, 

1988년에 4만 5천 명, 

1989년에 4만 2천 명, 

1990년에 6만 2천 명, 

1991년에 5만 8천 명, 

1992년에 6만 6천 명

 

이 이민을 떠났다. 

 

1984년부터 10년간 60만 명이 홍콩을 탈출했다. 무려 홍콩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중산층들이었다. 이른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나의 석사 지도교수는 나를 송별하는 식사 자리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은 어떨까? 한국인인 너는 지금 외국인 홍콩에 살고 있잖아.” 

 

이미 소문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이 호주로 이민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홍콩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이면서 ‘친대만파’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파답게 공자를 숭상하고, 유교를 전파하기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선생님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될 경우, 이미 우파로 공인된 본인의 활동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피난민답게) 매우 ‘이기적인’ 홍콩사람들에게,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인 홍콩에게 신물을 내고 있던 차였다. 

 

“아이고, 선생님 힘들어요. 저 지금 외국에 살고 있잖아요.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외국에 살면) 항상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여기에서 크게 대우받는 분인데, 외국에서 적응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선생님은 호주로 떠났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바보(죄송) 같은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지명도 덕분에 호주 중국인 사회에서도 대우받고, 여전히 공자의 도를 전하는데 열심이지만, 홍콩에서만큼 행복하실까 했다. 하지만 최근 언로가 막힌 홍콩의 답답한 상황을 보면, 선생님의 선견지명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이민 정책과 신홍콩인

 

홍콩의 인구 유입을 논할 때 ‘신이민’ 또는 ‘신홍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챙겨보아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에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와 상의하여 이민정책을 바꾸었다. 하지만 각자의 목표는 달랐다. 

 

홍콩 정부는 홍콩의 ‘두뇌 탈출’에 대응을 해야만 했고, 중국 정부로서는 미래 홍콩 판도에도 대응할 방법이 필요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신청자들을 선별해서 홍콩으로 이민을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홍콩 정부는 이민자를 심사할 권한이 없었다.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중국 정부의 소관이었다.

 

‘신이민’ 정책은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의 준비성이 돋보이는 정책이었다. 미래의 여론 주도권 다툼을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으로 홍콩을 접수하는 방식이었다. 1982년부터 매일 75명, 1995년부터는 150명이 홍콩으로 들어왔다. 불완전한 통계지만 이제 홍콩 인구 7백만 명 중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고 본다.

 

2019년 홍콩에서 일어난 친중국 시위.

 

그들은 언어 불통, 학력, 자립심 부족, 생활습관 차이 등으로 홍콩 사회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홍콩사람들은 홍콩의 사회복지 혜택만을 노린다는 의미에서 새로 이민 온 그들을 ‘메뚜기’라고 부르면서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태생적으로 ‘친중국’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날이 강해지는 ‘친홍콩파’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홍콩의 이슈에 대해 이 둘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홍콩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화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 사람들도 결국은 화교(華僑)가 아닐까. 화(華)는 ‘중국’을 아름답게 부르는 호칭이고, 교(僑)는 ‘해외에서 잠시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화교‘는 ’해외에 잠시 살고 있는 중국인‘이라는 말이다. 언제라도 돌아갈 수도 다시 떠날 수도 있다.  

 

 

그 말이 너무 정처 없는 불쌍한 사람 같으니까, 다시 ’화예‘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졌다. ’중국‘이라는 화(華)에 ’후예‘라는 예(裔)가 붙었다. 그곳에 정주해서 계속 살고 있는 중국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홍콩인들은 화교일까? 화예일까? 그들은 언제부터 자신이 대륙의 중국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지금까지도 홍콩인은 혈통적으로 틀림없는 중국인이다. 대부분 대륙 중국인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화적인 부분이다. 

 

춘절을 중시하고, 음식 문화도 비슷하고, 차를 즐기는 것도 비슷하고, 공자를 숭상하는 등에선 동일한 문화적 유전자(Meme)를 공유한다. 하지만 번체자와 홍콩식 광동어 등 홍콩인들끼리만 공유하는 문화적 유전자도 매우 많다. 

 

 

남북한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남북한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선 정치체제와 이념이 완전히 다르다. 어휘나 풍속 또한 다른 점이 많기에 자주 오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분단된 지 이미 7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같은’ 종족(민족)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같은’이라고 할 때 그것의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혈통, 언어, 문화적 유전자(밈) 등을 종족적 정체성의 주요 구성 조건이라고 본다. 근데 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 어디까지’ 같을 때 ‘우리’는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은 종족(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화두를 붙잡고 이번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앞에서 말했듯이 식민지 홍콩 초기 중국에서 대량의 하층민이 유입되었고, 점차 다양해졌다. 태평천국 시기에는 동란을 피해 부유한 계층이 유입되었다.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시기에는 광저우(廣州)에서 민중들이 13행 공무역 상관(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13개 상점)에 방화를 했다. 외국 상관들은 속속 홍콩으로 이주를 했다. 물론 세계 각지로부터 일확천금을 꿈꾸며 신천지 홍콩으로 몰려오는 화교도 많았다.

 

 

홍콩에서 홍콩중국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 

 

해외 중국인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종교 시설, 즉 사당이다. 중국인들이 사는 곳에는 제일 먼저 사당이 들어선다. 사당은 홍콩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사회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해외 중국인들은 종족 내 크고 작은 분쟁을 먼저 사당이나 종친회를 통해서 해결해왔다. 

 

몇 년 전, 태국의 중국인작가협회가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태국 내 중국인 사회의 분쟁은 6대 문중의 원로들이 해결해주며, 결정에 불복할 경우 파문되어 중국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에게는 현지 실정법보다 커뮤니티의 권위와 종족 내 체면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인데 1847년에 건립된 사당인 문무묘(文武廟)가 그 대표로서 지금까지도 홍콩(중국)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문무묘 전경과 내부 / 출처-블로그<허수아비의 시선 -->

 

문무묘에는 시험을 비롯한 온갖 문서운을 관장하는 문창제, 승진과 사업운을 책임지는 관무제를 모시고 있어 찾아오는 홍콩(중국)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끊이질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문무묘는 일개 사당에 불과하다. 하지만 홍콩(중국)인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분쟁을 해결해주는 자치정부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중국 대륙에서는 마을의 지도자들, 즉 향신(鄉紳)들이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향신은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행정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기에 역대 정부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지주계급을 숙청한다는 명분아래 2-3백만 명이 처형되면서 향신은 사라졌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여기저기에서 ‘비문명적인’ 무례한 행동을 하는 중국인들(물론 일부 중국인)이 나타나기 시작한 기원을 당시 향신 숙청부터 잡는 학자들이 많다. 전국적으로 향신들이 제거됨과 더불어 전통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중국어에서 ‘예(禮)’는 ‘리(理)’로 풀이되는데, ‘예절’은 ‘이치’와 ‘도리’인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도리’의 빈자리는 매우 큰 법이다. 

 

홍콩영국 정부는 중국인들의 대표 사당인 문무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을 통치 수단의 하나로 여겼다. 이른바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다스린다’는 ‘이화제화(以華制華)’였다. 정부의 행정부담을 들어주는 간접통치 방식이었다. 

 

홍콩의 중요한 중국인 단체는 몇 개 더 있다. 

 

그중 하나가 남북행공소(南北行公所)이다. 남북행공소는 1868년 중계 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 회사들로 구성되었다.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협회인데, 나중에는 홍콩에서 제일 큰 상업 단체가 되었다. 은행과 보험 서비스를 포함하여 커뮤니티 치안과 소방 업무도 담당했다. 

 

동화의원

 

1869년 창립되고 1872년에 정식으로 오픈한 동화의원(東華醫院)도 홍콩(중국)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동화의원은 광동(東) 중국인(華) 병원의 축약인데, 이름부터 서비스 대상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동화의원은 식민지 초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국인들에게 한방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는 홍콩영국 정부의 관심이 중국인들에까지 미치지 않았고, 중국인들 역시 서양 의료 기술을 신뢰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화의원은 처음부터 의료, 공익, 자선 사업 외에도 중국인들의 민사 청원을 해결하고 중재해 주었다.  

 

 

홍콩인의 탄생

 

식민지 초기부터 홍콩인은 언제나 (우리네 인생처럼) 명분과 실리라는 두 마리의 괴물 사이에서 애매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어쩌면 식민 치하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아니 살아내고 있는 모든 홍콩인에게 부과된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명분인 ‘민족’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실리인 ‘돈’을 따를 것인가. 앞으로 그들은 이 두 가지가 교대로 (무자비하게) 던지는 질문에 순간순간 대답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최근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을 중세까지 올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지만, ‘민족’이라는 아이템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건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던 건 분명하다. 

 

역사를 보면 팽팽하던 ‘명분’과 ‘실리’의 균형이 언젠가는 깨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홍콩인들에겐 1866년이 그 시작이었다. 1866년 광저우의 중국인들이 홍콩의 중국인 부자들을 공격하고 약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홍콩 중국인 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 조직을 만들었다. 비용은 순전히 개인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서서히 홍콩에서 부유한 중국인들의 사회적 책임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중국인’과 ‘홍콩(중국)인’의 정체성이 분리되는 시점이라고 본다. 

 

 

‘명분’과 ‘실리’는 팽팽하게 밀고 당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것이 ‘명분’이라면, 우선 먹고 살아야 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실리’이다. 

 

민족이 먼저일까? 내가 먼저일까? 다른 문화적 유전자가 생성되기 시작하는 갈림길에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같은 종족(민족)이기에 ‘반종족(민족)적인’ 홍콩의 중국인 부호들을 공격하라는 것은 명분일까 실리일까, 같은 중국인이라는 외침이 ‘명분’이라면, 홍콩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의 생존은 ‘실리’가 된다. 

 

대륙의 중국인과 홍콩의 중국인이 더 이상 ‘같은’ 중국인이라는 범주에 편안하게 머무를 수 없는 시점이 온 것이다.   

 

1884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가 월남을 편드는 중국과 갈등이 생기자 대만과 중국의 푸저우(福州)를 공격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출범 이래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다. 

 

 

프랑스 편을 들 것인가, 중국 편을 들 것인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프랑스 군함의 정박과 보급을 허락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피해갈 수 없는 갈림길이었다. 이때 영국 정부의 ‘명분’과 ‘실리’는 무엇일까? 

 

중국 편을 든다면 프랑스 군함의 정박을 허락하면 안 되고, 프랑스 편을 든다면 군함의 정박을 허락해야 한다. 중국 편을 든다면 홍콩(중국)인의 지지를 받아서 식민통치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지만, 프랑스 편을 든다면 프랑스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홍콩(중국)인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질 것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던 홍콩영국 정부는 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홍콩영국 정부는 프랑스 편을 들었고, 프랑스 군함의 선적을 위한 노동을 거부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였다. 프랑스에 저항하라는 중국 정부의 지시를 보도한 신문의 편집인은 기소하였으며, 항의하는 군중에게는 발포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한 달가량 지속되었다.

 

중국 정부(청나라)의 입장도 매우 ‘애매’했다. 표면적으로는 홍콩영국 정부를 비난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홍콩인을 선동하고 있었지만, 실제론 홍콩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전쟁 비용을 홍콩영부 정부 터전 아래서 돈을 번 홍콩의 은행들로부터 조달하고 있었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도 홍콩을 통해 수입하고 있었다. 

 

이런 ‘애매한’ 입장은 비단 청나라 정부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이후 군벌전쟁이나 국공내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동일했다. 홍콩의 정체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홍콩 초기 역사에서 중국인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1891년에는 목수들이 임금 문제로, 등나무 의자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근무시간 문제로 파업을 했다. 어떤 학자는 영국에 반대하는 애국주의가 배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생계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본다. 역사적인 사건사고는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에게 쉬운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홍콩이라는 영국 식민지의 중국인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이 영국인이 통치하는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이고,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계급’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향후 중국 정부가 홍콩 문제를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 정부는 민족적 정체성이 강한 삼합회(三合會) 등의 비밀결사를 이용하여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홍콩인 정체성’이 형성되다 

 

식민지로서 당연하겠지만 초기 영국인들은 홍콩(중국)인들을 차별했다. 법원은 이중 잣대로 백인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홍콩(중국)인에게는 태형 등 비인도적인 판결을 하기도 했다. 야간 통행금지는 실질적으로 홍콩(중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 

 

빅토리아 산정(peak) 부근은 아편전쟁 이후 1백 년 동안 영국인들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지금도 홍콩의 최고 상류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산 정상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전통적인 마을의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여 클럽, 호텔, 병원, 성공회 성당을 배치했다. 

 

빅토리아 산정과 산정에서 본 홍콩 전경 

 

피크 트램

 

지금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피크 트램(Peak Tram)은 1888년에 운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원래 산 위 고급 주택가에 사는 영국인들의 출퇴근을 위해 설치된 교통수단이다. 

 

또한 홍콩의 주요 클럽은 홍콩(중국)인의 가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1846년에 창립된 사교클럽인 ‘홍콩클럽’은 점주, 홍콩(중국)인, 인도인, 여자 등을 받지 않았다. 노는 곳은 물론 사는 곳도 달랐다. 

 

식민지 초기 홍콩은 남자들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 1872년에 시행된 인구조사를 보면, 홍콩(중국)인은 7대1, 유럽인은 5대1이었다. 당시 홍콩에서 사는 여자들은 홍콩(중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직업여성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기 홍콩 사회를 들여다보면,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홍콩 간다’의 유래로 이런저런 설을 말하지만, 나는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교클럽 문화는 지금까지도 홍콩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인데, 나는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박사 지도교수를 찾아뵙자 사모님과 고민을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허락을 받았고, 같이 가자고 했다. 

 

유명 작가와 인문학자들이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는 클럽이었다. 선생님은 홍콩의 클럽 문화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클럽이 종횡으로 홍콩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홍콩 사교클럽 중 한 곳의 모습.

 

결국 이런 클럽 문화는 부정할 수 없는 홍콩 문화일진대 ‘우리’를 확인하는 과정 즉 ‘끼리’ 문화는 ‘그들’을 생성하고 ‘소외’를 동반한다. 홍콩 사회는 식민지답게 내부적으로 이미 그렇게 취약했다.

 

자본주의의적 성장은 거대 자본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하고, 더불어 홍콩에서 홍콩(중국)인 재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뭉치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중화회관(中華會館), 1899년에는 홍콩(중국)인들의 상공회의소인 ‘화상회소(華商會所)’가 출범했다. 홍콩영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이 조직들은 사회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역시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의 하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치자인 영국인들과 부유한 홍콩(중국)인들이 상호 ‘실리’라는 접점에서 만나는 횟수와 범위가 확대되고 있었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명분’은 약해지고 경제적 ‘실리’라는 문화적 유전자를 통해서 이익을 공유하는 – 새로운 기득권이라는 - 또 하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우리’ 즉, 홍콩의 상류층은 이렇게 태어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이후 3년 8개월 만에 돌아온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눈에 띄게 완화했다. 홍콩(중국)인을 정부 부서 책임자로 승진시키고, 홍콩(중국)인의 거주가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빅토리아 산 정상과 장주도(長洲島)를 개방했다. 

 

식민지 역사가 1백 년이 지났고 일본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지배자인 홍콩영국 정부와 피지배자인 홍콩(중국)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홍콩인’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제 홍콩이 자랑하는 시스템을 살펴봐야 할 시간이 왔다. 식민지라는 속성 때문이겠지만, 홍콩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행정주도’라는 점이다. 홍콩의 행정 체계가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홍콩을 만들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행정이 정치를 흡수했던 영국 지배하 홍콩 

 

홍콩의 저명한 학자인 진야오지(金耀基) 선생은 영국 식민지하의 홍콩을 ‘행정이 정치를 흡수했다’는 말로 개괄했다. 홍콩의 제도적인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격언처럼 사용된다. 

 

정치가 필요 없을 만큼 제도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다. 법률, 공무원과 경찰, 세수, 교육 등 이미 제도가 완벽하기에 따로 정치라는 행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정치도 우리가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일 뿐, ‘정치’ 그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1980년대 홍콩

 

국가적으로 행정이 중요할까, 정치가 중요할까. 행정이 완벽하면 정치는 필요 없을까. 정치 없는 행정은 또 어떤 문제를 불러오게 될까.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 문외한이고, 여기에서 논의할 지면도 부족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정치인이 무엇을 아느냐’ 고 했단다. 정치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행정 제일주의나 효용 제일주의를 견지했다. 홍콩의 행정 중심 흐름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말한 건, 여기서 그의 공과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되었건,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가졌던 생각이 홍콩의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 중심주의는 거꾸로 보면 정치가 없다는 말인데, ‘정치 없는 홍콩’ 즉 ‘정치를 연습하지 못한’ 점은 원죄가 되어 홍콩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정치는 ‘주고받는’ 행위인데, 최근 시위에서 홍콩본토(locality)파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향후 상술할 것이다)  

 

출처-<연합뉴스>

 

홍콩 행정의 최고 책임자는 영국 여왕의 전권대표인 총독(지금은 특구행정장관)이었다. 물론 견제 장치도 있다. 행정국과 입법국은 총독에게 협조하고, 법률을 제정하는데, 양자 모두 총독에게 건의하고 질문할 수 있다. 

 

식민지 초기부터 영국 재벌기업들의 발언권은 매우 강해서 곧 참정권을 요구했다. 1850년에 자딘 그룹의 임원이 처음으로 입법국 의원이 되었고, 이후 1900년까지 50년 동안 입법국 의원의 70%가 재계 출신이었다. 홍콩은 식민지 초기부터 재계의 영향력이 매우 큰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자유 특히 경제활동의 자유는 그 폭을 더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던 곳

 

홍콩을 스토리텔링할 때 유행하는 말이 또 있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다’는 것이다. 홍콩의 ‘자유’는 유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홍콩의 ‘공기’는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때 공기는 자유를 말한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홍콩을 떠나고서 알게 되었다. 홍콩에는 편안함이 있다. 그 편안함의 근원을 곰곰이 따져보면 ‘자유’라는 걸 알게 된다. 

 

홍콩영국 정부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실현해주었다. 자유는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본 조건일 것이다. 네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거라 하고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기업의 성장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기업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줄 것인가는 모든 정부의 고민거리이다. 기업의 사업 아이템이나 활동 범주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 수치는 등락하기 때문이다.

 

‘경제 자유 지수’라는 것이 있다. ‘경제 자유 지수’란 국가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얼마나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이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인간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틀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이 인정받고, 또 그 능력이 현실로 구현되고, 다시 그 성과가 사회 전체에 골고루 나누어지는 선순환구조야말로 자본주의의 이상일 것이다. 

 

홍콩식 첨단 자본주의는 이렇게 기초를 마련했다. 

 

“우리 홍콩영국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공격하지 않는 한, 네 생각과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허용해주마!” 

 

홍콩 정부는 시종일관 ‘불간섭주의’를 자랑했다. ‘불간섭주의’는 홍콩의 자유를 상징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경제 관료들은 ‘작은 정부’라는 말도 자주 했다. 

 

2011년 신축된 홍콩 정부 청사

 

경제학에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하나이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흐름에 맡겨두자는 주장이 다른 하나이다. 

 

원래 1841년 홍콩이 무관세 자유무역항으로 선포될 때, 경제활동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자는 영국 고전경제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부터 영국 정부는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보라는 쪽에 기대고 있었다.

 

당연히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근대화된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바탕에는 영국식 자유주의와 이성이 깔려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1997년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달라지고 있다. ‘행정’을 지배하는 것은 ‘정치’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행정이 정치를 흡수한 시대’는 지나갔고, ‘정치가 행정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주권 반환 이후 홍콩의 공무원들은 중국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수시로 중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만이 홍콩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홍콩의 공무원들은 이제 국가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인사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2021년 4월 충성 서약을 거부한 129명의 공무원에 대한 해임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7월에는 구의회 의원 1백여 명이 사직했다. 

 

‘행정의 공백’과 ‘느슨해진 기강’을 지적하는 뉴스가 등장하고 있다. 홍콩을 떠난 혹은 떠나고 있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의 자유가 축소되고 있다는 뜻이다. 행정 또는 제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처럼 보인다. 요즈음 홍콩에서는 말이다. 

 

2020년 7월 8일, 홍콩 정부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을 감독·지도하는 ‘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국가안보공서’ 현판식.

 

 

초기 홍콩의 교육

 

홍콩의 성공과 실패는 ‘홍콩영국 정부(港英政府)’가 만들어 낸 것이다. 홍콩 사람들은 이렇게 ‘홍콩영국 정부’라는 말을 사용한다. 홍콩 정부는 사실 홍콩의 정부가 아니라 영국 정부의 지시 하에 움직이는 정부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콩의 성공과 실패는 영국의 것이다. 

 

식민지 초기 정부는 교육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중국어 서당과 교회학교를 지원해 주는 정도에 그쳤다. 대다수가 교회 학교였는데, 학교 측의 목표는 전도에 있었고, 학생들의 목표는 영어를 배워서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중시하던 교육 정책은 1878년부터 영어 중심으로 전환되어 식민지 홍콩의 영어교육 체제를 확립했다. 중국어 중심의 사립학교도 설립이 되지만 차선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임을 감안하면 영어는 광동어라는 현지어 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홍콩인들 대부분이 광동어 외에 영어를 하는데, 외국어 능력은 차원이 다른 정보의 습득을 보장한다. 물론 개인의 능력은 사회의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1908년 홍콩 총독이 대학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인도의 재벌 모디(H. N. Mody)와 홍콩의 중국인 재벌들 그리고 중국 양광 총독의 기부로 홍콩대학의 개교가 추진되었다. 대학준비위원회는 영어를 교학 언어로 결정했고, 중국어문학만은 중국어로 강의한다는 원칙을 만들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홍콩대학

 

1911년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대륙에서 홍콩으로의 인구 유입이 확대되었고 학령인구에 대한 교육 문제가 현안이 되었다. 각종 학교가 난립하였고, 게다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주입하였기에 홍콩영국 정부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1912년 개교한 홍콩대학은 특별히 한문과(漢文科)의 선택과목으로 ‘사서오경’과 중국의 전통경전을 두었다. 청나라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대학 운영 방침의 일환인데, 혁명을 찬양하는 강의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학생만 받다가 1919년 ‘54운동’의 영향으로 1921년부터 여학생도 받기 시작했다.  

 

1913년 홍콩영국 정부는 처음으로 ‘교육조례’를 발표하여, 모든 학교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륙의 ‘54운동’ 영향으로 홍콩에서도 민족정서가 고양되기 시작했고, 홍콩영국 정부는 민족주의 확산 흐름에 우려하여 중국어 학교의 교사양성 즉 사범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 조선의 3.1 운동(1919년)에 영향을 받았다. 

 

 

홍콩영국 정부는 유교 정신 선양 교육에 힘썼다

 

고전문학을 중시할 것인가, 현대문학을 중시할 것인가? 는 지금도 인문학 관련학과의 고민이다. 보수를 표방하는 국민당은 고전문학을, 진보를 대표하는 공산당은 현대문학을 중시했다. 당연하게도 청나라와 국민당은 공자를 위시해서 유교 경전을 금과옥조로 내세웠고, 청나라를 반대하는 혁명파와 공산당은 공자를 ‘사람을 잡아먹는’ 전통의 우두머리라고 찍어서 공격했다.  

 

교육만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분야도 드물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인간을 키워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인간을 만들어야 할까? 어느 것이 중요할까?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역사학자 임지현은 남한과 북한 모두 학교 교육에서 ‘충’과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했다고 보았다. 알다시피 ‘충’과 ‘효’는 체제와 질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남북한 모두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을 했다는 말이다. 남북한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역대 정부는 물론 조선 등 동아시아부터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까지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까닭이다. 

 

전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는 청나라의 교육방침이기도 하지만, 홍콩영국 정부의 방침이기도 해서, 홍콩영국 정부는 청나라를 뒤엎자는 혁명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은 도미노 게임과 같아서 청나라에 혁명이 일어날 경우 당연히 홍콩도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시종일관 염려했던 점은 청나라 정부가 적절하게 유지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가 무너진다면 그 여파는 식민지 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너무 강성해서도 너무 약화되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권을 가져간 이후에는, 가급적 청나라의 체면을 세워주고 현실적인 요구를 들어주고자 했다.

 

1925년 홍콩영국 정부는 광동성과 홍콩의 대파업으로 조성된 반영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중국전통의 도덕윤리에 기초한 중국어 교육을 제창했다. 1926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어 공립학교를 세웠고, 1927년에는 홍콩대학에 중문과를 개설했다. 

 

1920년대 홍콩

 

당시 홍콩영국 정부는 식민지 체제 안정을 위해 ‘충’과 ‘효’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 정신 선양에 힘을 쏟았다. 체제안정에 조금이라도 방해될만한 혁명가 손문(孫文)의 활동도 대문호 루쉰(魯迅)의 강연도 환영하지 않았다.  

 

1927년 루쉰은 홍콩 경찰의 감시 속에서 문무묘(사당) 뒤에 있는 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두 차례의 특강을 했다. 

 

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담하게 말하고, 용감하게 행동하고”, “옛사람을 밀어젖히고”, “고문을 버리고 생존하라”고 요구했다. 두 번째 특강에서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핵심으로 하는 봉건 문화는 수명을 다했다고 하면서, 영국 침략자들이 봉건 문화를 고취하는 이유는 우리의 부패문화를 이용하여, 우리 이 부패민족을 통치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손문(좌)과 루쉰(우)   

 

 

자유를 경험한 홍콩인, 새로운 교육환경과 만나다 

 

앞에서 나는 정체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 시리즈의 목표도 ‘중국’과 ‘홍콩’의 갈등이 사실은 정체성의 충돌임을 말하는 데 있다. 나아가서 충돌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보는 데 있다. 내 고민은 학계가 이룩해놓은 기존의 정체성 연구를 새롭게 두뇌과학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와있다. 

 

여기에서 살짝 두뇌과학 이야기를 해보자. 보수와 진보라는 정체성은 두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서로 다른데, 두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이유는? 우리의 두뇌구조와 그것의 작동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고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크게 나누면 어떤 사람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낭만적으로 사고한다. 

 

우리는 ‘저 사람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때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두뇌는 다르다. 타고난 두뇌(문화적 유전자)와 성장(교육)환경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두뇌(유전자)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니까 다음 세대의 두뇌를 생각한다면 환경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 환경을 두고 보수파는 보수적인 교육을, 진보파는 진보적인 교육을 해야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54년 홍콩에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아편전쟁부터 따지면 1백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홍콩에 영국식 교육이 정착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950년대 홍콩

 

1960년대 홍콩

 

홍콩의 공무원들을 접촉해보면 매우 우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홍콩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면 우수한 공무원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런 공무원을 영국식 교육제도가 배출했다고 본다.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교육제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홍콩의 주요 대학들은 여전히 아시아의 톱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영국의 경험을 사고 싶다. 영국은 1921년에 세계 최초의 대안학교인 섬머힐(Summer Hill)을 만들었다. 영국은 학생들이 노는 결정권 즉 자유가 있는 학교인 섬머힐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무려 1백 년 전에 ‘학교’의 의미와 ‘교육’의 방법에 대해 새롭게 고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홍콩인들이 지금까지 영국의 통치에 대해 연연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71년에 공포된 홍콩의 교육법에 의하면 수업이나 관련 활동에는 정치적인 노래, 무용, 구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정치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더욱 추동했다. 

 

교육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학문의 자유일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학문의 자유는 사회의 발전으로 피드백되었다.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우리 세대가 받았던 ‘국가’와 ‘민족’ 교육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1989년까지 우리에게는 영화관에서 영화만을 볼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애국가가 흐르는 영상을 보아야 했고 기립해야 했다. 홍콩에 도착했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의 하나는, 영화관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걸어가는 도중에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국민 의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7년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될 즈음부터 ‘국가’와 ‘민족’은 홍콩인들의 두뇌를 향해 시시각각 ‘도발’해오기 시작했다. ‘국민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즈음부터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뉴스에 앞서 ‘마음은 조국과 하나’라는 ‘국가홍보영상’을 보아야 한다. 

 

2021년부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안보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등 이제 그들의 두뇌는 완전히 다른 (교육)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두뇌(유전자)구조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

 

중국어에 ‘화인(華人)’이라는 단어가 있다. 중국, 홍콩, 대만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보편적인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국적으로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화인이야’라고 말한다. 

 

화인들의 두뇌(문화적 유전자)에는 ‘세상의 가운데 있는 나라(중국)’ 사람이라는 집단의식, 즉 ‘중화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화인’이라는 ‘명분’은 지역이라는 ‘실리’와 만나게 되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대륙과 홍콩, 대만 사람들은 모두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다시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으로 나누어진다.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역사에 노출되고, 그 역사는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이라는 각기 다른 두뇌(유전자)를 만들어낸다. 그 두뇌(유전자)는 다시 그곳 특유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 그들의 정체성은 다르다. 이번 편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다.

 

친구와 같이 여행을 할 때 공항 대합실에서 하는 놀이가 있다.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을 나누어보는 게임이다. 우리는 옷차림과 행동거지와 말투로 그들을 가려내고 있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보편적으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 ‘남한인’과 ‘북한인’으로 나누어지는데, 지금 이 시각에도 각기 다른 두뇌(유전자)로 재탄생되고 있는 중이다. 유학 시절, 홍콩 친구들로부터 상습적으로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남한에서 왔느냐, 북한에서 왔느냐’ 였다. 나는 발끈하면서 ‘보면 모르느냐’는 말을 쏘아붙였다.  

 

미국에서 영어 회화를 배울 때, 담당 선생님은 자신을 포함한 ‘미국인’들은 ‘영국인’들과 다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영국으로 단체여행을 가보면 확연히 다른 점을 알 수 있는데, 우선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에 비해 떠들썩하고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미국에서 들은 다른 이야기로는,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시민권을 신청할 때, 담당관이 미국과 한국이 축구 시합을 하면 어느 편을 응원하겠느냐는 질문을 한단다. 당연히 미국팀을 응원하겠다고 해야 짧게 끝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농담처럼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한국팀’과 지금 살고 있는 ‘국가팀’이 시합을 하면 어느 쪽을 응원하는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인이 되어 미국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정확히는 한국계 미국인)’이 있었다. 한반도 관련 정보를 다루는 그는 이른바 모국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자신이 취급하는 극비정보를 한국 대사관에 넘겼다. 

 

법정에서 그는 ‘애국심’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실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국인’일까, 아니면 ‘미국인’일까? 그는 영웅일까, 아니면 배신자일까? 

    

 

각 중국사회의 정체성은 실리적이다

 

중국 대륙은 매우 넓다. 어떤 학자는 중국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채 유지되고 있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준다. 하지만 넓다는 것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뜻도 된다. 통치자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백성들에게도 안 좋은 점이 있다. 행정력으로부터 보호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동사무소나 파출소에 가는데 하루 꼬박 걸린다면 문제는 작지 않다. 교통수단이 매우 열악했던 시절에는 목숨과 직결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힘도 돈도 없는 처지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회 특유의 ‘조직(방회, 幫會)’이 생기게 된 배경이다. ‘혈연’으로 뭉치면 종친회가 되고, ‘지연’으로 뭉치면 ‘향우회’가 된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차이나타운

 

호주 멜버른의 차이나타운

 

우리 ‘동네’와 우리 ‘고향’ 같은 지역성은 가장 보편적인 정체성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역’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지역 중심으로 생존해왔고, 세계 어디에서나 ‘지역’은 정치경제의 중심에 있다. 

 

이렇게 보면 지역적인 정체성은 ‘실리’의 분야에 속한다. 문제는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전근대성’과 ‘배타성’인데, 그 속에는 ‘비합리’는 물론 ‘우리끼리’라는 유치함이 가득하다. 

 

낯설고 물 선 지역(외국)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우선 가족이고, 그다음에는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조직이고, 그다음에는 같은 사투리(언어)를 사용하는 고향 사람들이다. 그들은 같은 성씨, 같은 ‘조직’, 같은 고향으로 뭉쳤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중국인들은 텃세에 대항하며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세 가지(가족, 조직, 언어) 모두 명분처럼 보이는 정체성이지만 사실은 매우 실리적인 정체성이다.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중국인들은 그 나라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 역시 종친회나 향우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있다. 중국인들의 단결력은 이제 이탈리아계 마피아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수준이 되었다.

 

태국 방콕의 차이나타운

 

미국 뉴욕의 차이나타운

 

홍콩에서도 중국인 향우회의 단결력은 막강해서 어느 향우회는 바로 삼합회(三合會) 같은 ‘조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홍콩에서는 자신이 어느 향우회 소속이라는 점만 밝혀도 자신과 사업이 보호받을 수 있다. 지연이라는 ‘실리’를 다른 지역인 홍콩까지 연장시킨 결과이다. 거대 재벌의 출현은 시간문제였는데, 홍콩의 재벌치고 ‘조직’이나 향우회의 지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홍콩인의 ‘민족의식’ 초기 성장사       

 

해외에서 ‘집단기억’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모국어로 된) 언론이다. 홍콩의 첫 번째 중국어 간행물은 1853년에 창간한 『하이관진遐邇貫珍』이었다. ‘멀고 가까운 보물 꼬치’라는 뜻의 이 신문은 중국인들의 계몽에 큰 공헌을 했다. 

 

1857년에는 『홍콩 세계 뉴스 香港中外新聞』, 1872년에는 『중국어일보 華字日報』, 1874년에는 『순환일보 循環日報』 등이 속속 창간되었는데, 이들은 청나라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논평을 많이 실었다. 특히 중국인 차별을 비판하고, 식민 통치를 감시하는 역할에도 충실하여 홍콩인들의 ‘민족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 중국문화 수호, 중국인들의 이익 보호를 목적으로 했다. 즉 ‘명분’과 ‘실리’ 모두를 추구했다. 바야흐로 언론의 노력, 중국인의 경제력, 중국인 차별, 국내 혁명의 영향 등으로 홍콩의 중국인 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1911년 10월 10일 공화제를 추구하는 ‘신해혁명’ 발발 소식이 홍콩에 전해졌다. 당시 총독은 순식간에 도시가 끓어오르는 것이 ‘불가사의’ 했다고, 중국인들이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기록했다. 

 

신해혁명 성공 후, 찍은 혁명 주역들의 단체 사진. 앞줄 가운데 손문이 있다. 

 

시위대는 중국은행과 청나라를 지지하는 신문사로 몰려가서 청나라의 황룡기를 내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동화의원(4편 참조)을 비롯한 중국인 사회가 나서서 피난민을 구휼하고, 학생들과 상인들은 혁명군을 위한 모금을 하고, 이발사들은 무료로 변발을 잘라주고, 기녀들은 수입의 절반을 혁명 사업에 기부했다. 

 

한족이 중심이 된 신해혁명에 고무된 홍콩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은 만주족 다음으로 이제 영국인을 몰아내야 한다는데 까지 내달렸다. 상황은 심각해지기 시작해서 군중들이 상점을 약탈하기도,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폭탄을 제조하는 공장이 발각되기도 했다. 심지어 감옥을 공격하기도, 홍콩 총독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혁명파의 과격한 행동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혁명파가 주장하는 공화제에 반대하고,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 힘을 얻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913년 6월 홍콩을 방문한 손문이 중국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홍콩영국 정부와 홍콩의 중국인 엘리트들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원세개(袁世凱)를 지지했다. 

 

원세개 (혹은 '위안스카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홍콩영국 정부는 혁명파의 활동에 대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날로 증폭되는 혁명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913년에는 모든 학교를 관리할 수 있는 ‘교육조례’를 제정하고, 1914년에는 언론 질서를 위한 ‘간행물 조례’를 제정했다.

 

 

1925년 홍콩 대파업은 중요한 ‘집단기억’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홍콩의 물가가 폭등했고, 홍콩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중국 노동운동의 영향과 좌파의 활동으로 노동조합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1920년 3월 홍콩의 ‘중국인 기계 노동조합’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에서 승리하자 몇 개월 만에 80개의 노동조합이 태어나기도 했다. 

 

홍콩영국 정부도 이런 흐름에 대응하여 주둔군을 증원하고, 정보기관의 정보 수집 능력을 개선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연료공급을 개선하는 등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중국 상하이에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925년 상하이의 일본계 공장에서 분규가 발생했고 노동자가 피살되었다. 5월 30일 대규모의 항의 시위가 열렸고, 시위대와 영국 경찰이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현대사를 뒤흔든 ‘5·30 사건’이었다. 

 

▲5·30 운동. 5·30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5.4 운동 이래 중국에서 발생한 최대 민중 운동이었다. 소규모 조직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은 이 운동을 계기로 이 중국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6월 19일 홍콩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아래 파업지도부의 요구사항을 보면 당시 홍콩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 여덟 시간 노동, 연소 노동자 폐지

2.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3. 중국인 입법국 의원에 대한 노동조합의 투표권 

4. 중국인과 유럽인의 동등한 대우

5. 중국인이 빅토리아 산정에 거주할 권리

 

노동 조건 개선에 민족 차별 금지 즉 정치경제적 평등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홍콩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이 ‘계급’과 ‘민족’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계급과 민족문제가 식민지 홍콩 사회의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때나 이후에나 이 두 가지는 홍콩이라는 지역 사회의 약점이었다.  

 

1925년 6월 21일 홍콩영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의용군을 동원했고, 식량, 자본의 유출과 거주민의 홍콩 이탈을 금지했다. 

 

파업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중국인 재벌과 중국인 의원을 중심으로 『공상일보工商日報』를 창간했다. 또한 파업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이탈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 규찰대’를 견제하기 위해, 깡패와 해적을 고용하여 ‘공업 유지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홍콩의 선원, 전차 노동자, 인쇄 노동자 등은 대규모로 광저우로 들어가서 6월 23일 대륙의 노동자들과 연대 시위를 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프랑스 해병대의 발포로 5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홍콩으로 전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정부와 파업지도부는 치열한 선전전을 전개했다. 파업지도부는 영국인과 그들의 ‘주구(走狗)’를 몰아내기 위해 싸우자는 전단지를 뿌렸고 대자보를 붙였다. 주구(走狗)는 ‘달리는 개’ 즉, 영국인 주인을 위해 달리는 중국인 개(앞잡이)를 말한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최고 수준의 욕이다. 

 

시위대가 파업 당시 배포한 팜플렛

 

중국인인 입법국 의원 두 명이 (목숨을 내놓으라는)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고, 그들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홍콩 사회를 위해 일하는 중국인들은 이제 ‘민족’과 ‘계급’의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민족’은 이렇게 분리되고 있었다.  

 

파업지도부는 영국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인 것은 물론, 홍콩영국 정부가 수원지에 독을 풀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노동자들의 홍콩 이탈을 유도하기도 했다. 교통편의(기차 편과 선박 편)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두 달 만에 25만 명이 홍콩을 떠나 광저우로 갔다. 

 

1년 이상 지속된 대파업 때문에 무역량이 50%가 감소되는 등 홍콩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26년 7월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대파업이 서서히 끝났다. 대파업은 홍콩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 즉 거대한 ‘집단기억’으로 남는다. 

 

본 기사를 읽는 독자들께 아래 세 가지 흐름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슈에는 ‘찬성’과 ‘반대’ 그리고 ‘중도’라는 의견이 나온다. 평소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를 묻고 싶다. 

 

1. 파업 찬성파 – 중국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하며 파업에 찬성하는 노동자와 학생

 

2. 파업 반대파 - 홍콩영국 정부를 지지하여 파업에 반대하는 상인들과 우파 노동자

 

3. 파업 중도파 – 자신들의 생계를 우선 고려하는 상인과 노동자. 광저우까지 가서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은 생계 곤란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었으나 ‘노동자 규찰대’에 의해 저지당한다.

 

사건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입장 즉 두뇌구조도 대체로 이 세 가지와 궤를 같이한다. 나는 지난 편에서 진보적 두뇌(유전자)는 조금 더 낭만적이고, 보수적 두뇌(유전자)는 조금 더 현실적이라고 했다. 즉 가족이 원하거나 고향 친구가 도와달라고 할 경우 바로 나서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한테 돌아올 실제적인 이익을 꼼꼼하게 따져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입장을 결정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당시의 홍콩이 그랬다.  

 

누구는 같은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고, 누구는 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민족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누구는 ‘그때 그곳’ 즉 중국에 연연하고, 누구는 ‘지금 여기’ 즉 홍콩에 충실하고자 한다. 또 누구는 ‘그때 그곳’도 중요하고, ‘지금 여기’도 중요해서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1925년 홍콩의 대파업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파업을 지지할까, 반대할까, 아니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까? 나아가서 여러분이 대파업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어떤 입장에 설까? 

 

 

홍콩, 중화민족에서 이탈한 ‘지역 공동체’가 되다

 

장기간의 파업에 반대하는 흐름에 주목해 보자. 파업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식민 주체인 홍콩영국 정부와 일체가 되는 ‘홍콩’이라는 지역주의가 이때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고한 ‘중화민족’에서 이탈한 ‘홍콩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대파업은 지역 공동체로서 ‘홍콩’이라는 존재(정체성)를 확인시켜주었다.

 

중국인과 혼혈아 등이 홍콩영국 정부의 의용군에 가입하는 붐이 일기도 했는데, 그들은 우체국, 소방대,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전차 운전 등 파업 노동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등 사회 질서 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화의원에서는 식량을 염가로 판매하고, 중국인 상인 지도자들은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식량을 구해오기도 했다. 

 

대파업이 끝나고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한 조치들을 보면 대파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홍콩영국 정부는 우선 대파업을 중국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보고 대응했다. 홍콩으로 도피해온 공산당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국민당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고, 공산주의 관련이나 제국주의 반대 서적을 들여오면 몰수하고 벌금을 부과했다. 

 

더불어 홍콩영국 정부는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통치한다’는 ‘이화제화’의 원칙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이 ‘민족’으로부터 ‘홍콩인’을 분리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인 엘리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공립 중국어문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중국어교육과 중국전통교육을 중시하고, 처음으로 중국인을 행정국 의원으로 임명했다. 

 

1930년 홍콩

 

‘집단기억’은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대파업의 기억은 누구에게는 열악했던 노동환경이 개선된 기쁨으로, 누구에게는 자신의 사업이 낭패를 당한 슬픔으로, 누구에게는 집단폭력에 대한 분노로 남는다. 

 

이런 기억들이 각자의 두뇌(유전자)에 각인되어 이후 홍콩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비율로) 반응(확대 또는 축소)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여서 ‘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을 만들게 된다. 또 하나의 지역적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본 연재 기사에서 일본 통치 편을 쓰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다. 알다시피 일본 관련 이슈는 한국 사회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영국과 일본의 통치를 비교해서 소개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이번 회를 써 내려간다.

 

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 155년의 모든 기간을 영국이 지배한 건 아니다. 1941년 12월 25일 ~ 1945년 8월 15일, 3년 8개월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홍콩인들은 155년 동안 영국과 일본 두 나라에게 식민을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지배에 대한 홍콩인들의 스토리텔링은 ‘극명하게’ 다르다. 

 

 

일본의 지배와 영국의 복귀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며,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홍콩에서도 10여 개의 항일 지원 단체가 구성되었고,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과일야채 노점들이 자선 판매를 하기도하고, 귀향 복무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상하이, 난징, 우한 등이 속속 함락되고 대륙의 신문사들이 홍콩으로 와서 복간하면서, 홍콩은 중국 남부의 항일 중심지가 되었다.

 

1938년 9월 홍콩영국 정부는 중립을 선포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병사 파견, 무기 제공 등) 요청을 거절하고, 중국인 입법국 의원의 중국 재정 지원 제안도 부결시켰다. 홍콩적십자회의 파견 봉사도 금지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의 민족 정서를 고려하여 민간 차원의 지원만큼은 계속 허용했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다음날 광동성과 홍콩의 경계에 있던 일본군이 홍콩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홍콩의 카이탁 공항을 폭격하고, 포병과 항공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신계로 들어왔다. 

 

25일 홍콩 총독 마크 에이치슨 영(Sir Mark Aitchison YOUNG)은 일본군사령부가 진주한 페닌슐라(Peninsula) 호텔로 가서 항복했다. 이로써 3년 8개월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었다. 영국군 9천 명, 홍콩정부 공무원, 영국과 미국의 교민 등 3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 항복 후 홍콩시내로 진입하는 일본군.

 

1943년엔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홍콩 반환을 요구했다. 그즈음 영국 정부 내에서도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세계 질서에 협조하는 이미지 관리 등을 이유로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쇼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홍콩에선 중국과 영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서로 받겠다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제 명실상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홍콩이 영국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판단을 했다. 영국 정부도 결국 홍콩을 계속 지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처칠 수상은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가능할 것이라고까지 하며 홍콩 주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8월 24일, 마침내 중국은 홍콩에 대한 주권 회복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을 두고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전쟁 중이라 홍콩을 두고 다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중국 국공내전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로 많은 노동력과 자금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1948년 말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공산당은 홍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공산당이 파업을 선동해서 홍콩 경제를 마비시키고 혼란을 유도하여 홍콩을 회수할 명분으로 삼을까봐, 공산당이 운영하는 학교를 폐쇄하는 등의 대비를 했다. 

 

1949년 초에는 홍콩으로 엄청난 인구가 유입되었고 그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국경을 만들었다. 홍콩 시민이 아니면 중국으로의 출입경과 홍콩 내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8월부터 홍콩 거주민 신분증을 발급했다.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공군 (국공내전)

 

 

찬란하게 스토리텔링 된 영국의 지배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에 따르면, 일본 통치 시기에 시민들은 ‘공포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쌀, 설탕, 식용유, 소금 등 생필품은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식량이 모자라 많은 시민들은 대륙으로 강제 이주될 정도였다. 

 

일본 통치 기간 3년 8개월 만에 홍콩의 인구가 1백 50만에서 60만으로 감소했다. 당시 화폐인 군표를 남발하였기에 통화 팽창으로 홍콩경제도 ‘반신불수’에 빠졌다. 

 

반면 ‘홍콩스토리’에서 영국 통치 시기는 언제나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포장된다. 일본과 영국의 통치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극단적인 편차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졸저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를 참조하기 바란다) 

 

홍콩역사박물관의 설명만 보면, 영국의 통치 시기는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정말 보잘 것 없던 농어촌에서 영국의 식민지로 변천”했다고 되어 있다. 총독 28명의 ‘치적’을 정리해 놓았는데, 치적만 등장할 뿐 그들의 실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영국 통치 시기의 상황에 대해 한 마디의 비판은커녕 오히려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런 기록만 보면, 홍콩인들에게 영국은 구원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홍콩역사박물관. 역대 홍콩 총독들. / 이미지 출처-티스토리<일상에 날개를 달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을 홍콩역사박물관과 홍콩해방(海防)박물관에서는 ‘중광(重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광복(光復)‘과 같은 뜻인 ’중광(重光)‘이라는 두 글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빛을 찾았다고? 아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조국’인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영국의 통치로 다시 돌아가는데 ‘중광’이라고 표현하다니.”

 

홍콩해방박물관에서는 영국 ‘통치’ 시기와 일본 ‘점령’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영국은 홍콩을 ‘통치한’ 것이고, 일본은 홍콩을 ‘점령한’ 것이라 한다. 박물관의 설명은 그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언론기사나 교과서의 스토리텔링도 마찬가지다. 

 

홍콩의 역사 인식을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생긴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이라고 마냥 좋지만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가 영국의 식민지배 시기보다 무조건 못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의식을 보면, 영국의 지배에는 긍정을 마지못해 찬사를 보낸다.

 

이 부분에서 말하고 싶은 건, 역사도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것이다. 서술된 역사가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일본에 대한 평가는 중국과도 관련이 깊다 

 

제국주의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동남아시아까지)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근현대사에 있어 일본과 몇 번의 전쟁을 치른 중국은 일본과의 역사 서술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지금의 통치자인 중국공산당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세력을 키워온 존재이기에 제국주의 일본을 끌어들일수록 자신의 존재와 당위가 부각된다. 

 

타자로서 일본의 존재는 중국공산당의 역사, 나아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연히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는 물론, 홍콩의 교과서에서도 일본은 자주 활용되고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선양하는 영화를 ‘주선율’ 영화라고 하는데, 중국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지원하는 ‘주선율’ 영화나 드라마 대부분은 항일을 주제로 한다. 민족주의에 편승해서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한껏 뽐내고 국민의 지지를 쉽게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걸린 대형 벽화. 중일전쟁 때 중국 항일부대와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 이미지 출처-<한경DB>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방향과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 구성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나됨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는 타자이다.” 

 

타자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는 말은, ‘적’을 만들어야 ‘내’가 보인다는 말이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남’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란 것인데, 내가 비판하는 대상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우리가 비판하는 대상을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타자는 우리를 비추어주는 거울인 것이다. 영국 통치 시기에 영국은 중국인을 차별했고, 일본 통치 시기에 일본은 영국인을 차별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면, 민족주의는 적들의 피를 먹으면서 자란다. 한국 민족주의가 일본을 포함한 서구 제국주의의 결과물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콩(박물관이나 교과서 등)에서도 일본을 강력하게 ‘타자화’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영국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홍콩의 영국군이 일본군에 투항하고 2주 뒤인 1942년 1월 10일, 일본군 사령관은 홍콩의 중국인 지도자 130명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일본군 사령관은 중국인은 일본의 적이 아니라면서, 중국인은 일본인과 힘을 합쳐 ‘대동아공영’ 즉, 아시아 모든 민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다. 

 

일본군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들에게 중국인을 향한 절하기를 시켰다. 또 인력거를 끄는 사람과 청소부들을 향한 절하기를 시켰다. 일본군이 홍콩에서 민족과 계급을 의식하면서 통치했다는 의미이다. (영국인에 비해 대우를 해줬다는 의미이지 홍콩인에 대한 핍박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1941년 12월, 도조 히데키의 명령으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에서 작성한 <대동아 공영권에서의 토지 처분안(大東亞共榮圈における土地処分案)> 문서에 나온 대동아공영권 구상 범위. 아메리카, 호주 일부와 인도까지 포함된다. 

 

당시의 관방 간행물은 연일 홍콩은 이미 “동아시아인의 홍콩”이 되었으며, 영국의 식민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일본이 동아시아라는 구호로 다른 식민 주체인 영국을 타자화한 것이다.

 

일본 통치 시기는 영국 통치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통치하는’ 이화제화(以華制華)가 기본이었다. 중국인 엘리트들을 전면에 내세운 ‘화민대표회(華民代表會)’와 ‘화민각계협의회(華民各界協議會)’를 통해 통치했다. (하지만 실권은 전혀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했다고 스토리텔링 된다) 

 

일본 통치 시기에는 영국 통치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인들이 중앙행정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중국인들에게 해명하고 설명했다.  

 

 

서구적인 시각과 중국적인 시각에 지배당하는 홍콩의 역사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일본 치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일본이 만든 대동아공영권 개념에 찬동하면서, 영국 통치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토로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해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우리’를 배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이라고 ‘중화민족’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유격대의 일원으로 싸웠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홍콩인들 특히 일본 유학을 경험한 중국인 지도자들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지못해 협조했다. ‘공포’와 ‘현실’이 소극적으로나마 협조를 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홍콩인들은 두 개의 중국인 대표 단체(화민대표회, 화민각계협의회)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할 수 없이 협조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두 단체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부터는 회의에서 발언을 하지 않는 등 거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홍콩역사박물관

 

홍콩역사학계는 주로 서구적인 시각과 중국적인 시각의 지배를 받고 있다. 홍콩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를 강조하는 재미 역사학자 차이룽팡(蔡榮芳)은 역사 서술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역사책이, 

 

1. 일본군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2. 대동아공영권은 정치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

3. 애국적인 홍콩인들이 일본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점만이 부각될 경우, 역사의 다양한 환경 또한 두루뭉술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의도된 역사만 남게 된다.

 

차이룽팡은 일본 통치 당시의 홍콩인 모두를 일본의 ‘협력자’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차이룽팡은 일본에 대한 ‘협력자’를 세 종류로 나눈다. 

 

1. 당시 달리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득이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부류 - 대다수의 홍콩인

2.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인의 통치에 적극적이면서도 주동적으로 협력한 부류

3. 일본이 제창한 ‘아시아인의 아시아’ 개념에 진심으로 동조하면서, 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의 패권을 반대한 부류

 

차이룽팡은 ‘협력자’라는 범위만을 분석하였기에 저항 세력의 존재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 세 가지 부류에 해당하겠지만, 적극적으로 투쟁한 부류가 분명히 있었다. 우리의 독립군에 해당하는 동강(東江) 종대(縱隊)였다. 

 

사람은 다르다.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두뇌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뇌의 작용에 따라 누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 상황을 절대 수용할 수 없고, 누구는 이도 저도 아닌 유체 이탈의 상태로 살아간다.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일본 통치 시기에도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지 평소 살던 그대로 살고, 누구는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면서 신관에 대한 저항의 길을 걷고, 누구는 모든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산다.  

 

역사는 상상을 허락하지 않지만 아주 매정하게 이렇게 상상해보면 어떨까? 일본의 통치기간(식량 사정과 경제 등이 좋지 않았다) 동안 홍콩인들이 잘 먹고 잘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서술되었을까?

 

 

바뀌는 통치자와 환경, 홍콩인의 실리주의를 강화하다

 

식민주의는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오래전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연 우리는 모든 나라, 모든 힘으로부터 해방되었을까.

 

1950년 홍콩 구룡지역.

 

홍콩은 일본의 통치를 받았지만, 전쟁 직후 중국대륙처럼 그러한 반일 감정은 없었고, 일본 상인들도 1940년대 말에 홍콩으로 다시 돌아올 정도로 분위기는 좋았다. 원래 식민지라는 입장이기에 다른 식민 경험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물론 전쟁 시기였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되었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통치받은 경험은 도리어 영국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마음을 만들었다. 전쟁 중이라는 점이 고려돼야 하겠지만, 일본 통치 시절은 이전의 영국 통치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로 인해 많은 홍콩인들이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44년 홍콩의 저명한 중국인 의사는 런던에 가서 중국인 사회 상층부는 모두 영국의 통치를 희망한다고 유세하기도 했다. 

 

되돌아온 홍콩영국 정부는 일본에 협조했던 홍콩인과 외국인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게 처리했다. 인도인 경찰과 간수들은 인도로 송환했지만, 다른 경찰들은 상당히 많은 인원을 계속 임용했다. 중국인 엘리트들은 구분해서 처리했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사들은 정계와 사교계에서 퇴출했고, 소극적으로 일한 사람들은 다시 기용했다.  

 

일본이 제창한 아시아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중국인으로서 홍콩인들의 민족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홍콩영국 정부로서는 통치 스타일을 바꾸어야 했다. 

 

1946년에는 홍콩 재건 건설 프로젝트를 모두 홍콩(중국)인 상인들이 수주했다. 1948년에는 홍콩(중국)인을 처음으로 수석 정무관으로 임명했다. 1951년에는 입법국 의석 중 홍콩인수가 영국인을 초월했다. 또 ‘인종차별법’ 즉, 외국인만 빅토리아산 정상과 장주도에 거주할 수 있는 법률을 폐지했다. 

 

빅토리아산 정상 전망대.

 

차이룽팡은 일본 식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홍콩인들의 정서가 유예, 동요, 의혹, 기대를 보여주었는데, “홍콩인이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의 통치를 경험하고 난 이후, 홍콩인들의 정체성은 더욱 복잡해졌다. 

 

영국의 통치하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이 일본의 통치하에서는 갑자기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영국 통치 시기에 고생하던 사람이 일본의 통치 시기에는 ‘떵떵거리면서’ 사는 장면에 홍콩인들의 두뇌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역사 경험은 각자의 두뇌(유전자)에 각인되는데, 누구는 명분(낭만적)적인 입장이, 누구는 실리(현실적)적인 입장이 강화된다. 특히 ‘이중’의 식민지 경험 때문에 ‘명분’보다는 이놈 저놈 겪어보니 그래도 믿을 것은 ‘실리’밖에 없더라는 신념이 사회적 권위를 얻게 된다.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는 이렇게 ‘실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는 변화를 기대하고, 누구는 더 강한 개혁을 원하고, 누구는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을 갈구한다.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의지,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이 만나는 지점에 갈등이 기다리고 있고, 갈등의 끝에는 폭력과 전쟁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사회주의 국가이며, 민족의 자존심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시하는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다. 원래 공산당은 정체성이 매우 강한 집단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모인 정당이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20세기 중반 중국공산당이 대륙의 주인이 될 경우,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하는 것은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 모두의 관심사였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중화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서구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조차지와 조계지를 단칼에 회수할까. 영국에게 영원히 할양한 홍콩도 회수할까. 전쟁도 불사할까. 

 

(그즈음 홍콩의 우파 신문들은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대만)으로 반환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의 대홍콩 전략 : 장기 타산, 충분 이용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직전 단계인 사회주의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이제 혁명을 수출해야 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우선 홍콩이 그 대상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1949년에 홍콩영국 정부는 38개의 좌파 단체를 해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좌파 조직들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홍콩마카오업무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홍콩 문제는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서 협상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에 마오쩌둥은 영국 기자에게 영국인이 홍콩의 중국인들을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홍콩 회수에 관심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좋아한다. 방침은 ‘장기 타산, 충분 이용’이었다.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로 그대로 두고 장기적인 계획 하에 충분히 이용하자는 것이다. 

 

▲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사 홍콩사무실 건물 입구. 사진은 2019년 11월, 홍콩 반정부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직후 소방관들이 피해 상황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공산당은 신화통신사의 홍콩지사를 통해 해외 화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산당을 선양하고 홍보했다. 화교들로부터 받는 지지와 외화를 생각하면, 현재 홍콩의 위상을 흔들 이유가 없었다.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명분에 비해 경제 등의 실리가 대단히 크게 보였던 것이다. 대체로 명분을 포기하면 실리는 무한해진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중국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와의 불평등조약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시종일관 ‘불평등조약’의 결과물로 우선 지목되던 홍콩영국 정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고, 홍콩의 반환을 요구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반환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영국의 예상과는 달리 홍콩의 운명은 현상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중국이 홍콩을 회수할 여력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중국공산당이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데다가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권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한 곳은 영국이었다(1950년). 대만의 중화민국(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고 있던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정이었다. 중국과 주고받은 셈이었다. 실리와 실리의 만남이었다. 

 

저우언라이

 

1957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홍콩을 외국과 경제 연계를 할 수 있는 포스트로 삼을 수 있는데, 홍콩을 통해서 외국 투자를 흡수할 수도, 외화를 벌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기간(1950-1953),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 해외 물자를 구입했다. 중국 정부는 한국전쟁 기간 금수조치를 뚫고, 홍콩을 통해서 석유, 천연가스, 페니실린 등을 밀수입했고, 홍콩의 신계 거주민들은 트럭과 배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중국으로 실어다 팔았다.

  

 

홍콩에 대한 삼국(영국, 중국, 미국)의 입장

 

중국은 초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해서, 나중에는 스스로 대문의 빗장을 닫아걸었기에 ‘죽(竹)의 장막’이라고 불렸다.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홍콩은 중국이 아니면서 중국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중국 안에서 보는 중국보다 홍콩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더 정확하다 할 정도였다. 

 

홍콩은 중국의 변경, 서구의 변경으로서 서로가 대치하는 경계였다. 중국에게는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고, 서구에게는 중국을 감시하는 틈이었다. 역사학자 저우쯔펑(周子峰)은 영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홍콩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정도로 홍콩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3개 국가의 입장을 잘 대변한다. 

 

 

1. 영국: 홍콩에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고, 미국을 도와 중국을 견제하고 싶었다. 동시에 미국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2. 중국: 홍콩을 세계와 통하는 정치·경제적 통로로 삼고, 홍콩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를 약화시키고 싶었다. 중국은 언제나 홍콩은 미 제국주의의 포스트이고, 영국은 미국의 주구라고 비판했다. 

 

3. 미국: 중국을 감시, 견제하고 포위하는 전초 기지로 삼았다. 홍콩 주재 미국총영사관은 세계에 나가 있는 총영사관 중 최대 규모로 운영되었다(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보 대부분이 홍콩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카드였다. 

 

 

홍콩에서 격해지는 좌우 정체성 충돌 

 

1950년 전후 국민당 군인과 인사들이 대거 홍콩으로 피난왔다. 임시 난민 캠프에서 좌우파는 수시로 충돌했다. 1950년대에는 대만(국민당)의 ‘대륙 수복’ 방침으로 홍콩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은 첨예하게 대치했다. 1955년 국민당의 작전은 인도네시아로 가는 중국대표단이 탄 비행기를 폭파하는데까지 나아갔다. 

 

1956년엔 홍콩에서 대만(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훼손되자 우파가 폭동을 일으켰다. 좌파의 상점을 약탈하고 좌파를 살해했다. 좌우 노동자는 물론이고 폭력 조직까지 총출동하였고, 스파이들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59명이 사망했다.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의 항의로 홍콩영국 정부는 소요 주동자 등 3천 명을 체포했다. 

 

1956년 당시 폭동 진압을 위해 파견된 홍콩 왕립 경찰들.

 

이렇게 좌우가 이렇게 극심하게 충돌하는 국면을 맞이하며, 홍콩영국 정부는 ‘탈이념’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시행을 서둘렀다. 좌우의 정체성을 희석시켜야 했다. 중국, 대만과는 차별화된 정체성 교육으로 홍콩인들을 정치로부터 분리해야 했다. 

 

1952년부터 교육과정에서 중국 역사와 중국어문을 검토하기 시작했었고, 중국문화 교육에 치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중국의 우수한 문화로 중국과 대만이 강조하는 당파적 정체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보편타당한 명분으로 극단적인 명분을 희석하고자 한 것이다. 

 

변화와 개혁과 혁명에 대한 정체성이 극단적으로 충돌한다면, 우선 양쪽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통분모부터 찾는 것이 좋다. 홍콩인들이 배우고 익힌 중국문화는 보편타당한 인류애 차원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어 소통 능력을 배양하면서도 중국 전통사상과 고전문학을 중시하고 교과서 심사를 강화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출발한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기대는 나날이 커졌고, 대륙의 통일은 중국인으로서 홍콩인들의 애국심을 지속적으로 소환했다. 게다가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홍콩의 특수성은 언제나 인종차별과 부정부패라는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가 상승과 노동자 생활의 악화 등으로 좌파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선전·선동도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대에는 홍콩에서 『문회보文匯報』, 『대공보大公報』, 『신만보新晚報』 등 친중국계 좌파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국민당도 홍콩에서 『홍콩시보香港時報』, 『공상일보工商日報』, 『성도일보星島日報』 등 친대만계 우파 신문들을 창간하고 선전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역시 홍콩을 세계 반공 선전 기지로 삼았기에 우련출판사(友聯出版社)를 통해 『중국학생주보中國學生週報』, 『아동낙원兒童樂園』, 『대학생활大學生活』 등의 신문 잡지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 주재 미국 공보처는 작가들의 반공 작품 창작을 지원하였고, 선전 잡지 『금일 세계今日世界』 등을 발행했다. 

 

1957년 홍콩에는, 중국어와 영어 등을 합쳐 무려 42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문화대혁명, 홍콩으로 들어오다

 

1965년 홍콩에서는 스타 페리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1,465명이 체포되었다. 스타 페리 요금 인상 항의에서 출발한 폭동은 그동안 쌓여온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을 분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즈음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인민공사의 실패와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의 최대 위기를 사회주의 정체성을 극단화하는 운동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사회주의 정체성이라는 명분은 나날이 증폭되어 다시 ‘혁명’을 소환했다. 마오쩌둥을 ‘미신의 정도까지 믿어라’, ‘맹종의 정도까지 복종해라’는 말을 한 커칭스(柯慶施)가 하루아침에 정치국 위원으로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어린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공자 사당을 해머로 부수고 있는 홍위병들.

 

사르트르 등 좌파 사상가들로부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쾌거라고 칭송받는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고, 그 파장에 중국도, 홍콩도, 대만도, 세계도 긴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사상에 ‘미쳐버린’ 홍위병들은 홍콩으로도 와서 시위를 이끌었다, 

 

1967년 5월 1일 노동절, 홍콩에서 노사 분규로 노동자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홍콩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른바 ‘67폭동’이 시작되었다. 좌파 단체들은 공장의 담장에 대자보를 붙이고,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항의 시위에 나섰다. 

 

5월 17일 베이징에서 1백만 명의 군중이 베이징 주재 영국대표처로 몰려가서 ‘영국이 홍콩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다음 날엔 베이징 운동장에서 총리와 외교부 장관 등을 포함하여 10만 명의 군중이 모여 홍콩영국 정부가 국민당과 결탁하여 중국의 안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선동하는 집회가 열렸다.

 

홍콩의 좌파는 ‘홍콩 각계 동포 반영(反英) 항폭 투쟁 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영국 제국주의 반대’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인민일보와 신화통신사가 시위를 선동하고 나섰다. 영국이야말로 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중국을 방해하는 음모 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이중으로 홍콩 동포들을 착취하고 있으니 빨리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분은 언제나 큰 힘을 발휘했다. 

 

홍콩의 좌파 노동자 수천 명은 홍콩총독부를 포위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선동하는 방송과 전단지의 살포를 금지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6개월 만에 51명(경찰 10명)이 사망했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폭탄에 부상을 입었고 5천 명이 체포되었다.

 

세 번째 사진 속 시민들이 들고 있는 것은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이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뒤늦게 이런 원칙을 하달했다.

 

“이치에 맞게(有理), 이익을 챙기고(有利), 절차를 중시하라(有節).”

 

하지만 홍콩 좌파의 정서는 고양될 대로 고양되어 있었다. 폭탄으로 영화관, 공원, 시장 등 공중 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버스와 택시에도 불을 질렀다. 

 

(이런 급진적 시위를 보면, 생각이 든다. 시위는 어떻게 끝나는 것이 좋을까?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하는 선은 어디일까? 정부는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변화와 개혁과 혁명을 원하는 각각의 정체성은 어떻게 조율되어야 할까?) 

 

1967년 7월, 혁명을 원하는 홍콩의 급진 좌파는 돌, 염산, 어포 등으로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업그레이드되기 마련이다. 8월에는 좌파의 폭력을 비판한 유명한 아나운서를 포함하여 2명이 몸에 기름이 부어진 채로 불에 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혁명을 선동하는 신문 『홍콩야보香港夜報』, 『신오보新午報』, 『전풍일보田豐日報』 등 3개 신문을 폐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 대표처도 불에 탔다. 너무도 과격해진 홍콩의 좌파는 9월부터 중국 정부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홍콩영국 정부도 강온 양면 정책을 발표했다. 파업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면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방침이었다. 홍콩대학 학생회도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홍콩대학생연합회는 폭력 정지를 호소하고 나섰다. 

 

지역(커뮤니티) 조직, 각종 협회, 학교 등이 속속 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중립지 『명보明報』가 정부를 지지하고 나서자 발행인 겸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金庸)이 좌파의 암살 명단에 올라 싱가포르로 도피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홍콩인들은 너무도 과격해진 혁명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역사는 이성적이지도 않은 데다가 참을성까지 없기에 하나의 장면에 방향을 틀어버린다. ‘67폭동’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가 그래왔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집단기억, 홍콩인을 보수화하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발생한 홍콩의 ‘67폭동’은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에 뚜렷하게 각인된 집단기억이다. 대다수 학자는 ‘67폭동’이 중국과 분리된 홍콩의 정체성을 탄생시킨 또 하나의 대사건임에 동의한다. 정도를 넘은 과격한 시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폭력은 이렇게 이쪽이나 저쪽에게 극단적인 빌미가 된다. 

 

초기에는 홍콩 서민들 대다수가 시위를 지지하고 동정했다. 하지만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면서 시위의 당위는 시민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대륙에서 탈출한 홍콩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공포감을 불러냈던 것이다. 홍콩인들에게 혁명은 폭력과 동의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홍콩인들의 보수화, 즉 두뇌(유전자)가 안정을 중시하는 쪽으로 크게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폭력 시위는 홍콩인들의 좌파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홍콩에서의 노동운동을 얼어붙게 했다. 이후 홍콩영국 정부는 좌파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시도, 즉 그들을 꾸준하게 ‘타자화’ ‘악마화’ 했다. 

 

노동자의 권익 개선에 관련된 모든 논의는 정지되었다. 나는 이 사건 때문에 홍콩의 노동운동이 궤멸되었고, 그것은 홍콩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trip.com>

 

홍콩에서의 문화대혁명은 홍콩인들을 다시 태어나게 만든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우리 편인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 시작된 것이다. 

 

적어도 중국공산당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은 더 이상 ‘우리’의 조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반대로 홍콩인들과 영국 식민지 정부와의 일체감은 깊어져 갔다. 더불어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변화를 꿈꾼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면서 말이다. 점진적인 개혁이 좋을까, 세상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이 좋을까? 대학생 시절 나는 40대 이상의 어른들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그때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어른들께 죄송한 마음이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이유는 어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같이 깨끗한 젊은이들만 살면 세상은 금방 맑아질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 방법은 혁명밖에 없었다. 

 

 

역사는 인격이 없다. 역사에게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특정한 사건이나 운동이 극단적으로 해석되고 소비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성과 합리는 없고, 극우나 극좌만 난무하는 광풍은, 두고두고 역사의 부담으로 남는다. 

 

문제는 해석이고 수용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시종일관 내가 제일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었고, 이 연재의 목표이기도 하다. 홍콩판 문화대혁명인 ‘67폭동’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개인도 집단도 불행해진다.

 

아주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사건이나 운동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67폭동’은 기존의 홍콩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서민들의 절규였다.

 

1967년 홍콩, 한 남자가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홍콩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67폭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기사 <홍콩의 진실에 대하여 8편> 클릭)

 

 

오랫동안 홍콩인들의 마음속에 홍콩은 없었다 

 

홍콩 사회는 장기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각기 다른 형식으로 홍콩인을 착취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의 결과가 세계적으로 가장 큰 빈부격차였다.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는 사회였지만, 그것은 소수 상류층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미국을 가리켜 모든 정체성을 녹이는 용광로라고 하고, 반대로 모든 정체성이 살아있는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미국 내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각기 자신들의 커뮤니티 즉 ‘우리끼리’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나는 홍콩 사회 역시 각기 따로 살고 있는 사회라고 본다. 홍콩 사회는 ‘인종끼리’의 사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계급끼리’의 사회였다.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에 대한 복지에 무관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7년에는 장례비조차 없어 1천 3백 구의 시신이 가두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콩의 노동 조건과 주거 환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2021년의 조사에 의하면 홍콩 인구 7백만 명 중 26만 명이 여전히 극빈층의 주거 공간인 닭장집(cage house), 관짝집(coffin house)에 살고 있다. 

 

홍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닭장 아파트’

 

닭장 아파트 내부

 

장기적으로 홍콩인들은 홍콩에 살고 있었지만, 홍콩에 살고 있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를 ‘내적 망명’ 또는 ‘내부 망명’이라고 한다. 재미없는 강의를 듣거나, 끝없는 잔소리를 듣는 곳에서 우리는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몸은 그곳에 있되 마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내 마음은 이미 떠났어’라고. 가정이나 사회가 똑같은데, 마음이 떠난 내부 망명자가 많아지면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처음부터 홍콩영국 정부는 큰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홍콩의 사회복지가 너무 좋아질 경우 중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은 더욱 많아질 것을 늘 우려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찰을 위시한 홍콩 공무원들의 부패도 심각했다. 경찰이 매춘, 도박, 마약 등의 거래에 개입하여 해마다 벌어들이는 돈이 10억 홍콩 달러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인 경찰 간부는 437만 홍콩달러(당시 아파트 한 채가 2만 5천 달러 정도)를 착복하고 영국으로 도주하였는데, 여론의 압력으로 체포 송환된 적도 있다. 지금까지 홍콩이 자랑하는 공직자 수사기관인 ‘염정공서(ICAC)’가 출범하게 된 계기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영국이 변했다 

 

문화대혁명이 홍콩을 강타한 이후, 홍콩영국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홍콩인들의 마음을 홍콩이라는 공간에 붙잡아두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경제정책도 ‘자유방임’에서 어느 정도 개입하는 ‘적극 불간섭주의’로 전환되었다.  

 

①노동시간을 단축하고 (1968년) 

②정부의 정책을 설명하고, 청년 활동을 지원하는 민정사무실을 설치하고 (1968년)

③노동자들을 위한 배상금액을 인상하고 (1970년) 

④여성 노동자에게 출산휴가 권리를 부여하고 (1971년)

⑤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1971년) 

⑥입법국 의석을 확대하고 (1972년)

⑦10년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1972년) 

⑧홍콩 청결 운동(클린 홍콩)을 추진하고 (1972년)

⑨‘파트너’ 개념의 사회복지정책을 발표하고 (1973년)

⑩반부패 전담 기구인 염정공서(廉政公署)와 소비자위원회를 설치하고 (1974년)

⑪중국어를 법정 언어로 인정하고 (1974년) 

⑫9년 무상교육까지 실시하고 (1978년) 

⑬3개 대학을 승인했다. (1978년)

 

공원, 운동 시설, 도서관, 박물관, 영화관 등의 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하였다. 이런 시민복지 사업은 홍콩인들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식민 종주국인 영국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1964년 노동당이 집권하여 인종이나 여성차별에 대한 인식 등 탈식민화에서 진전이 있었고, 당연히 홍콩영국 정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66년 이후 홍콩에서는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1968년에는 영국 정부의 식민지부가 외교부로 편입되면서 홍콩영국 정부의 자주권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중국과 영국 간에도 해빙 모드로 전환되어 1972년에는 대사급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고, 1974년에는 영국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1979년에는 홍콩 총독이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1974년 마오쩌둥과 영국 수상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중국은 홍콩, 마카오의 반환을 원치 않았다

 

영국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에도 홍콩을 계속 지배했는데, 중국은 (일관되게) 표리부동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식적으로는 홍콩을 영국 제국주의가 불법 점거한 식민지라고 비난하면서도 - 당장 반환하라는 요구보다는 - 장기적으로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 

 

세계의 식민지들이 속속 독립하면서 홍콩의 국제적인 지위도 검토되어야 했다. 1972년 유엔은 세계 식민지의 현황을 조사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만 했다.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 반환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중국의 입장은 아래와 같았다. 

 

①홍콩과 마카오는 영국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점령당한 중국 영토의 일부이다.

②홍콩과 마카오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중국 주권 범위 내의 문제이다.

③근본적으로 이른바 ‘식민지’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④따라서 반식민지 선언 중에 적용될 식민지 명단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⑤유엔은 이 문제를 토론할 권한이 없다.

 

동년 11월 열린 유엔 27차 회의에서 유엔은 홍콩과 마카오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요구를 인정했다.

 

1971년 중국(위)이 유엔에 가입했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중국 유일의 정부로 인정되었다. 그로 인해 대만은 국가로서 국제법적 지위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대만 대표(아래)는 유엔에서 축출되는 표결이 나기 전에 스스로 탈퇴를 선언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1971년 중국이 유엔에 가입되고, 마침 전 세계 식민지 청산 문제가 대두되었다. 홍콩도 자연스럽게 식민지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중국 정부는 식민지 명단에서 홍콩을 제외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되고 있는 현실이 발목을 잡을까 우려해서다. 이때도 중국공산당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학자들은 중국 정부의 결정에 대해 홍콩의 미래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 결정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고, 홍콩인들도 배제될 것임을 암시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당시 홍콩인들은 홍콩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기에 주권 회복에 대한 중국의 의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홍콩인들은 1970년대 홍콩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그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현상을 유지하면서 실리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1974년 포르투갈이 마카오 반환 의사를 중국에 전달했으나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이것도 중국이 홍콩을 회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직격탄을 맞아 홍콩에서 일어난 홍콩판 문화대혁명 ‘67폭동’ 이후, 홍콩영국 정부의 정책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홍콩영국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홍콩인들의 마음을 홍콩이라는 공간에 붙잡아두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경제정책도 ‘자유방임’에서 적극적인 개입만 자제하는 ‘적극 불간섭주의’로 전환되었다.  

 

노동인권 등 여러 권리가 보장되었고, 편의시설이 대폭 확충되었다. 이런 시민복지 사업은 홍콩인들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편 참조 링크)

 

 

점점 공고해지는 홍콩인 정체성

 

지역은 ‘집단기억’을 공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이 나의 기억일 수 있듯이, 집단을 생성하는 기억도 있다. ‘집단기억’은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홍콩판 문화대혁명(67폭동)은 홍콩이라는 지역성을 매우 분명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집단의식’이라는 것도 있다.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을 말한다. 홍콩의 문화대혁명(67폭동)에서 좌파들이 보여준 폭력은 홍콩인들의 ‘반중 의식’과 ‘반공 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0년대에는 홍콩의 지하철 운행 등 공공서비스와 복지 수준이 크게 제고되었다. ‘가난한 중국’과 강력하게 대비되는 ‘잘사는 홍콩’이라는 ‘우월의식’이 더해졌다. 

 

문화적인 유전자 즉 밈(Meme)도 홍콩 정체성의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소룡(李小龍)과 성룡(成龍)으로 대표되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는, 1980년대 오우삼(吳宇森),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영화까지 이어졌다. 1974년은 인기로 볼 때 광둥어 팝송(Canton Pop)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광둥어 노래는 대륙과 대만을 강타했다. 

 

1970년대 홍콩 대중문화의 발전은 문화적으로도 홍콩인들에게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2. (장국영)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양조위, 왕페이)

 

한편 1970년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느슨해진 중국의 분위기를 틈타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인구가 홍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흐름은 홍콩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안감은 ‘우리’의 배타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상대를 차별할수록 내 정체성은 뚜렷해지는 법이다. 

 

1972년까지는 홍콩에서 출생하는 사람에게만 영주권이 주어졌다. 1972년부터는 연속 7년 이상을 거주하면 영구 거주민 자격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부터는 홍콩에 일단 도착하면 거주할 수 있는 법을 폐지하고, 불법 입국자는 체포해서 돌려보냈다. 

 

1980년대 후반 내가 홍콩에 도착해보니 경찰들은 행인들에게 수시로 신분증을 요구했다. 행색이 초라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할 경우 경찰은 어김없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 역시 씻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가면 어김없이 신분을 확인받았다. 홍콩이라는 꿈을 쫓아 대륙에서 숨어들어온 ‘타자’들을 골라내기 위한 홍콩의 노력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나는 종업원과 손님들의 ‘애매한’ 눈길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볼 때 광둥어를 하지 못하고 보통화를 사용하는 나는 ‘폭력적’이고도 ‘가난한’ 중국에서 막 도착한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막 이민을 온 아찬(阿燦) 같은 ‘타자’였다. 

 

(아찬은 1979년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중국에서 막 넘어온 촌티 나는 캐릭터로 한꺼번에 햄버거 30개를 먹기도 했다. 이후 아찬은 대륙에서 건너온 ‘신이민자’를 폄하해서 부르는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홍콩인들에게 타자가 되고 있었다)

 

1979년 홍콩의 TV 드라마 People in the Net(망 속의 사람들)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 정체성 공고화를 가속화하다

 

홍콩은 ‘애매한’ 공간이라 표현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긴 말인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더욱더 애매한 위치가 되었다. 경계선 너머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홍콩 사이에는 국경선이 생겼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국에서는 살벌한 정치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조국’을 바라보고 있는 홍콩인들에게 정치적인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홍콩의 소중함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홍콩 정부는 ‘제3의 길’로 나아갔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명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홍콩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통치의 안정을 확보하는 길이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면서 서구의 대표적인 가치인 자유와 법치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홍콩의 정체성은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술했던 여러 상황이 발생하며 중국은 (홍콩인들에게) 타자로서 ‘강력하게’ 인식되었고, 그즈음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한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란 당시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했던 공익광고로서 각종 캠페인을 통해 홍콩인들에게 홍콩은 우리 집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운동이다) 

 

그렇게 형성된 홍콩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 중 하나는 ‘제3의 공간’이다. 홍콩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공간인 데다, 정치적으로 중국이나 대만 편향도 아니면서,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나아가서 홍콩 내에도 광범위한 ‘제3지대’가 존재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철저한 중립 말이다. ‘제3지대’는 당신의 사상이나 이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혼종’과 ‘변경’이라는 기호로 대표되는 후식민 담론이 유행할 때, 홍콩은 그 실제 ‘보기’로서 빠지지 않았다. 중국과 영국, 즉 동양과 서양의 변방으로써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독특한 홍콩의 문화가 만들어진 이론적 배경이다. 

 

학자들은 영국의 통치 방식이 홍콩이라는 ‘동양의 진주’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중국인이 통치하는 양안(대륙, 대만)보다 선진적이고 근대화된 공간이라는 말이다. 서구적인 합리성으로 따져볼 때,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곳이(었)다. 

‘중국-홍콩체제’를 공부하면서 늘 한반도체제도 같이 생각해본다. 남한과 북한은 반드시 통일(통합)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어디까지 통일(통합)할 것인가? 분리된 채 통일(통합)되는 것은 나쁜 것인가? 남한과 북한의 정체성은 어디까지 어떻게 보호되는 것이 좋을까? 

 

지역은 집단기억을 공유하지만, 더불어 공통의 화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문화적 유전자가 전해질 것이다. 

 

영화 ‘첨밀밀’ 한 장면.

 

20세기 후반, 홍콩에선 1997년이라는 운명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은 유지되고 존중될 수 있을까?’에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홍콩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주권 반환에 대해서 토론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홍콩을 어떻게 할까, 반환을 요구할까, 그대로 둘까, 영국은 순순히 돌려줄까? 개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관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다. 

 

개인이나 기관이나 사유 방법의 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든 바뀐다고 하기보다는 안 바뀐다고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만큼 일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 바뀌면 좋겠다는 심리가 지배적일 때, 우리의 두뇌가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중국에게 홍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왜 거위를 죽이겠냐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홍콩 조야의 기대와는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홍콩을 가지려는 영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1970년 말, 신계의 조차 기한이 20년 앞으로 다가오자 홍콩 경제계가 먼저 걱정하기 시작했다.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원래 ‘영구적’으로 영국에게 ‘할양’한 것이고, 가장 넓은 신계 지역은 1898년부터 99년간 빌려준 것이었다. 신계 지역은 1997년이 되면 중국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1979년 홍콩 총독 머레이 맥리호스와 덩샤오핑 

 

1979년 홍콩 총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홍콩 회수에 대한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총독은 홍콩으로 돌아와서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주권을 연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중국 정부의 홍콩 반환 방침이 분명하게 공개된 시점은 1982년이었다. 덩샤오핑은 히스 (당시 전직) 영국 수상을 만나 대만에 대한 기본정책인 ‘9개 조항’의 조건으로 홍콩을 회수할 것이라고 했다. 홍콩의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주택 가격이 폭락했다. 

 

1982년 당시 영국의 수상 마거릿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기세로 다시 덩샤오핑과 담판을 했다. 

 

대처 수상은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 등) 국제법상의 효력을 들어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을 계속 통치할 것이라고 했다. 덩샤오핑은 난징조약이 불평등조약이며 조약 책임자인 청나라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콩을 회수하기로 했음을 밝혔다. 

 

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

 

중국과 영국은 정식 담판에 돌입했다.

 

영국은 주권과 통치권을 나누어서 협상했다. 홍콩의 주권은 중국으로 돌려주되 통치는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중국은 1997년이 되면 주권과 통치권 모두 회수할 것임을 견지했다. 

 

영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득실을 충분하게 따져보았다. 

 

-경제적으로 큰 이익은 이미 1960년대에 끝났다는 점 

-중국이 군사 공격을 할 경우 홍콩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점 

-외교적으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

-영국 정부 내 탈식민 분위기가 커졌다는 점 

 

등을 이유로, 영국은 홍콩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수많은 난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1984년 9월 양국은 『중영공동성명』을 체결하고,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게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홍콩특별행정구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고도의 자치를 누린다. 

 ②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과 최종심판권을 지니며, 현행 법률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홍콩특별행정구는 현지인 스스로 통치한다.

 홍콩에서의 영국의 이익을 보호한다.

 홍콩특별행정구의 기본법을 제정한다. 

 

다시 요약하면 ‘일국양제’, ‘50년 불변’,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사회주의, 홍콩에는 자본주의를 시행한다는 ‘일국양제’에 대해 대처 수상은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했고,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 유물주의와 역사 유물주의의 공로’라고 했다. 

 

 

중국이 홍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

 

결과적으로 중국의 승리였다. 영국으로서는 두 가지가 아쉬웠다. 

 

①모든 원칙에 대해 일일이 자세하게 토를 달지 않았다는 점 

②중국-영국의 2자회담이 아닌 중국-영국-홍콩의 3자 회담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 

 

영국은 대영백과사전 같이 매우 자세한 합의서를 원했지만, 중국은 큰 맥락만을 기록한 두세 장 정도의 서류만을 원했다. 합의 내용을 자세하게 규정하지 못한 점은 홍콩의 민주화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홍콩

 

중국과 영국 사이에 주권 반환 협상이 시작되면서 홍콩인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회담장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변호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어느 신문의 정치 만화는, 부모(덩샤오핑과 대처 수상) 앞에서, ‘종이(중영공동성명)’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에게 팔려 가는 소녀를 그렸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었던 홍콩사람들의 처지를 전통 결혼을 앞둔 신부의 모습에 빗댄 것이다. 홍콩인들의 열패감과 분노는 그만큼 컸다.   

 

홍콩인들의 마음은 이민으로 표현되었는데, 1980년부터 86년까지 매년 2만 명 정도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매년 3-4만 명 정도가 해외로 떠났다. 

 

 

‘일국양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국민당은 대만 섬으로 후퇴하였지만, 양자는 여전히 금문도(金門島)를 비롯한 곳곳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1955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인대에서 중국은 가능한 조건하에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대만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고 했다. 

 

1979년 1-2월 덩샤오핑은 방미 기간에 대만이 ‘조국’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대만의 현실과 제도를 존중할 것이라고 했다. 1981년 8월 그는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개 성, 일개 지역으로서 원래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 부부가 국빈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물을 바라보고 있다. 

 

1982년 1월, 덩샤오핑은 대만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일개 국가, 양종 제도’ 개념을 공개했다. 

 

1982년 9월 덩샤오핑은 영국의 대처 수상과 회담하면서, 현행 홍콩의 정치, 경제, 제도 심지어 대부분의 법률도 보류할 수 있다고 했다. 1984년 6월 덩샤오핑은 홍콩 경제계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일국양제’로 대만과 홍콩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일국양제’에서 ‘일국’과 ‘양제’의 무게 중심과 순위였다. ‘일국’이 중요한가, ‘양제’가 중요한가의 지루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중국정부는 당연히 중국이라는 국가가 우선이고, 홍콩으로서는 자본주의 제도를 50년 동안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양제’를 보장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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