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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 출처: 주미국대한민국 대사관 본문
* 식민지 시대
미국역사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1607년 버지니아에 최초의 항구(恒久) 식민지 제임스 타운(Jamestown)이 건설되었고 그 해부터 독립선언의 해인 1776년까지의 약 170년 간이 식민지 시대였다. 미국에의 영국인 이민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인 혼란상태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스튜어트가(家)의 권력자들에 의한 교회에의 압정속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고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이동을 개시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청교도단)가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Plymouth)에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이어 1630년 존 윈드로프(John Winthrop)가 900명의 이민과 함께 세임렘(Salem)에 도착하였고,보스턴도 이 무렵에 건설되었다.
17세기에 이민 온 여러 민족중에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계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75%에서 90%가 영국계였고 종교적 자유나 경제적 기회를 찾아 대거 이민을 했다. 18세기에 들어와 독일인,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인이나 아프리카로부터 끌어온 흑인 노예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이 여러 민족의 혼합이 그후의 미국인의 국민성을 특징 짓게 된다.
북부의 식민지에는 Pilgim Fathers가 이민한 이래 청교도(Puritan)가 많았고 그들은 자영농업이나 해양에 관련된 일에 바로 종사하였다. 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교회 학교가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1636년 창립), 예일대학 (1701년 창립)은 이 시기에 문을 열었다. 이들 북부식민지에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대의제 의회를 갖고 자주독립이 정신하에 자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점이다. 한편 남부의 식민지에서는 버지니아 식민지 이래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의해 경영된 대농장에서 담배, 쌀, 감자 등이 생산되었다. 이 식민지 시대에 근본적인 미국사상이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가 있다.
13개 식민지가 자치를 가진 것은 유럽의 다른 식민지와 큰 차이점을 보여 주는 것이며 민주적 정부의 사상은 벌써 이 무렵부터 싹트고 있었다. 또 풍요롭고 개방된 국토에서 근면과 용기를 갖고 일하면 모든 사람이 거의 평등하게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 바 개척정신이며 자유롭고 정열이 넘치는 미국적 사상은 미국민이 대륙을 횡단하여 급진적으로 발전을 가져오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 독립혁명 시대
영국 본국은 식민지를 원료의 공급지, 제품의 판매시장으로 생각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식민지의 상공업에 대한 간섭, 통제는 많은 불평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764년의 설탕법과 영국에서 식민지에의 수출세의 강화, 밀무역 단속강화로 북부 식민지의 무역업자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남부 식민지에서는 담배, 감자 등의 매입가격이 부당하게 쌌으며 의류, 가구, 주류 그 밖의 상품이 부당하게 비싼 값으로 강매되고 있었다. 특히 1763년 영국 국왕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 대한 이주를 금지함으로써 서부에서의 토지 획득에 열중하고 있는 많은 사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1765년의 인지조례(印紙條例),1773년의 차조례(茶條例)에 의해 한층 고조되었고 항쟁이 표면화,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1774년 필라델피아에서 제 1회 대륙회의가 열렸고 단결하에 식민지의 권리와 자유의 확보 등이 토의되고 확인되었다.
식민지와 영국 본국과의 항쟁은 1775년, 마침내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 콘코드(Concord)의 싸움에서 무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때 제2회 대륙회의를 열어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1776년 7월 4일(이 날이 후에 독립기념일이 된다) 식민지 13주의 대표들이 모인 필라델피아에서 제 3회 대륙회의를 열어 '독립선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포되었다.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즈 등에 의해 기초된 독립선언은 로크나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연법 사상, 민주적 정치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8년의 파리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미국 13개 식민지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로 정해졌으며 1800년에는 워싱턴으로 옮겨졌다. 워싱턴 대통령 정권은 연달아 대립하는 두 파의 균형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무장관 해밀턴을 중심으로 하는 연방파는 동부 뉴잉글랜드의 상공업자의 지지를 얻어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노린 데 반해 국무장관 제퍼슨을 중심으로 하는 반연방파는 남부, 서부의 농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각주의 권리를 주장한 보다 자유로운 민주주의에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전자가 현재의 공화당의 전신이며, 후자가 현재의 민주당의 전신이다.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은 새로운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하여 농업을 장려하고 토지개척을 진흥시켜 독립자영의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1803년에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매수하여 미국의 국토를 거의 배로 확장시켰다. 제5대 대통령 몬로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에 즈음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미국대륙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는 선언, 이른바 '몬로선언'을 1823년에 발표했다. 이것은 그후 오랫동안 미국 외교의 기본원칙(고립주의)이 되었다. 또 제7대 대통령 잭슨은 서부적인 신념을 갖고 북동부의 노동자, 서부의 소농(小農)편에 서서 민주정치의 발전에 노력했다.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수에 이어 1819년에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획득, 1845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 결과 뉴멕시코, 애리조나, 캘리포니아를 합병, 1846년에는 영국과 오리건협정을 맺어 북위 49도 서쪽의 서부를 획득하였고 또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는 등 19세기에 잇따라 영토를 확장해 갔다. 1860년에는 주의 수는 33개로 증가했다.
이러한 영토의 확장은 변경의 서점(西漸)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여러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제각기 뜻을 안고 서부로 몰려들었으며 미주리에서 당시의 멕시코령(領) 산타페(Santa Fe)까지 이어지는 산타페 산길, 미주리에서 오리건까지 이어지는 오리건 산길은 19세기 중엽에는 주요한 통상로였다. 또 브리감 영이 인솔한 모르몬 교도의 유타(Utah)에의 이주는 종교적 이주의 두드러진 일례이다. 그리고 1848년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에서 생긴 골드러시(Gold Rush)는 유럽으로부터 많은 이민을 끌어들였다. 19세기 말 역사가 프레드릭 잭슨 터너는 '미국사에 있어서 변경의 의의'를 중요시하여 변경을 '민주주의의 안전판'이라 해석하고 있는데 이 변경의 서점(西漸)이라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그야말로 미국적 생활이 형성되고 개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 남북전쟁 시대
19세기 전반(前半)의 미국을 지역적으로 특징 지으면 상공업 중심의 북동부, 노예 노동력에 의한 면화재배의 남부, 곡물과 가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노동력을 추구하며 시장의 확대를 노리는 북동부는 노예제도를 둘러 싸고 남부와 점차 대립하게 되었다. 1820년에는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둘러싸고 남북이 대립했는데 결국 미주리 주는 노예주로서 인정하게 되었고 그 대신에 동주(同州) 이북을 자유주의에 편입한다는 타협에 의해 충돌은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북부에서 스토우 부인의 '엉클 톰의 오두막집'의 출판 등을 계기로 노예제 폐지의 기운이 점차 고조되었고 1860년 북부 산업자본가의 지지를 배경으로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1861년 민주당의 지반인 남부 여러 주는 합중국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남부 연합을 형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남북의 내란이 시작되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남군이 우세했으나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령을 발하여 300만 명의 전 노예를 해방하고 1865년 리치먼드의 점령을 계기로 북군이 승리를 거둔 뒤 통일을 되찾았다. 이 무렵 링컨 대통령이 대 격전지인 게티스버그의 전사자 추도연설 가운데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남군 항복의 5일 후 링컨은 암살되었다. 흑인 문제는 그 후 오랫동안 미해결인 채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 산업국으로의 비약
4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미국 전역은 인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전쟁 후의 50년 동안에 미국은 산업국으로 비약적 발전을 했다. 남북전쟁의 전쟁터였던 남부의 황폐는 특히 극심했고 점차 대농장주가 몰락하여 소작인, 노동자가 늘어났고 면화재배 일변도의 산업에서 섬유공업, 철공업도 조금씩 발전해 갔다. 서부에서는 1862년의 자작농법에 의해 자작농이 늘어났으며 기계를 사용한 대규모 농업에 의한 밀, 옥수수의 생산, 가축의 육성 등 농업은 크게 발전했다. 이 광대한 서부는 수로와 대륙횡단철도의 이용에 의해 동부와 밀접하게 결부되었다. 서부는 원료를 동부에 공급함과 동시에 동부에서 가공한 제품의 시장으로서 큰 구실을 했다.
발전이 눈부신 동부에서는 풍부한 자원과 산업의 기계화를 배경으로 뉴욕, 피츠버그, 시카고 등의 대공업도시가 발달하였고 은행가, 투자가는 제조업자와 결탁하여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산업계에 자본의 집중과 독점의 경향이 두드러졌고 1890년대까지 록펠러, 모간, 카네기 등의 대재벌이 나타났다. 이러한 대자본의 독점에 대해서 1886년에 직업별 연합조합인 미국노동총동맹(AFL)이 결성되었다.
산업의 발전에 수반하여 19세기 말에 걸쳐 일터를 찾아 새로이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흘러 들어왔다. 이 무렵의 이민에는 동유럽, 남유럽, 슬라브계의 민족이 많았다. 대량의 이민은 일터를 얻을 기회가 많은 도시에 집중되어 노동자간의 경쟁이 일어나 빈민가가 나타났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생겼다.
20세기가 되자 남북전쟁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가져온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정치에서도 나타났다.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취임(1901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참가 무렵까지의 시기는 혁신시대라고 불린다. 도시에서는 이민노동자의 문제나 그 밖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년노동의 금지, 여성노동자의 보호, 노동시간 제한 등의 노동자보호입법이 추진되었다. 또 독점 산업자본에 대해서는 반트러스트법에 의한 독점규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해외진출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1898년 하와이를 병합하고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도를 획득했다. 이어 1899년 국무장관 존 헤이는 문화개방을 선언하였고 중국시장에 미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 선언에 의해 미국은 카리브 해로부터 중남미 방면과 태평양, 극동 방면의 두 방면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하였고 1914년의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두 방면을 잇는 것이며 미국 세력의 강화를 나타냈다.
*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시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래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1917년의 독일에 의한 무제한 잠수함작전으로부터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이것이 미국이 대외전에 참가한 최초였다. 종전(終戰)에 즈음하여 윌슨 대통령은 14개조의 선언을 제안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당사국인 미국은 국내에서의 고립정책을 지지하는 의견에 눌려 결국 이 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채무국에서 세계제일의 채권국이 되었고 이어 1920년대는 공전의 경제번영의 시대가 되었다. 비즈니스는 황금시대를 구가하였고 대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이 촉진되었다. 미국 전역에 재즈 음악이 유행하였고 라디오, 영화가 보급되고 헨리 포드에 의한 자동차는 대량생산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또 이 무렵 린드버그는 최초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하였고 항공기의 장래성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경제번영은 1929년 10월 뉴욕, 월 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에서의 주가의 대폭락으로 일전(一轉)하였고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 공황은 은행, 철도를 비롯하여 전기업에 파급되었고 수백만 명의 실업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후버 대통령은 자유방임주의의 입장에서 부분적인 시책으로서 불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1933년 공황이 절정에 달했을때 선출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New Deal)이라 불리는 정책을 실행했다. 우선 전국 산업부흥법에 의해 공업활동을 촉진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임금, 노동시간에 관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였고 그들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여 노동자의 보호를 규정했다. 농업 면에서는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생산의 제한이나 과잉농산물의 정부수매 조치를 취했다. 또 금본위제를 떠나 인플레 정책을 취하고 1934년에는 달러 평가절하를 단행한 뒤 은행법으로 정부의 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경제에 자극을 주어 고용을 촉진할 목적으로 창립된 테네시 유역개발청(TVA)은 수력발전용 댐을 이용함으로써 유역의 자원개발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뉴딜정책은 정부가 대규모로 경제에 대해서 통제와 간섭을 가하는 것이며 자유방임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사상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이 결과 전국 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도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라는 이유로 1935∼1936년에 무효, 위헌 판결을 받고 몇 가지 법률로 세분되었다. 또 노동자에 대한 보호는 노동조합 운동에도 영향을 끼쳐 1935년에 미 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산업별 조직회의(CIO)가 결성되어 1886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노동 귀족적 색채를 지닌 노동총동맹(AFL)과 더불어 양대 조직이 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불황에 대한 국내정책에 망쇄(忙殺)되어 1933년 이후 몇 년 동안 정부는 대외적으로 고립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세계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체주의 3국이 모두 군사기구를 만들어 열악한 인접국을 위협하여 번갈아 가며 제국주의적 침략공세로 나왔다. 그 무렵 1935년과 1937년에 미국은 중립법을 제정하고 교전국과의 통상, 교전국에 대한 차관공여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에 의한 폴란드 공격으로 말미암아 유럽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영,불 측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임기 2기 째에 들어서서 중립법의 폐지에 애쓰고 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0년에 3선 되었을 때 미국을 '민주주의의 무기'라고 발언했다. 이듬해인 1941년에는 획기적인 무기대여 법안을 성립시켰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유럽에 대한 군수원조물자의 수송 안전확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8월에 영국 수상 처칠과 대서양 상에서 회견하고 사실상의 전쟁선언인 '대서양헌장'을 기초했다. 이때 이미 미국은 중립국이 아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미군기지 공격 때부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그 후 유럽과 태평양의 두 전성에서 3년 반에 걸친 전쟁이 계속되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선전한 뒤 1944년 아이젠하워 지휘 하의 미영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갖고 프랑스의 노르만디에 상륙하였고 1년이 못되어 독일을 항복시켰다. 태평양 전선은 처음에는 일본측에 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1942년의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전세가 뒤바뀌어 1944년 미국은 사이판, 필리핀을 점령하였고 이듬해인 1945년에는 일본 본토 오끼나와도 연합국의 수중에 돌아갔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에 미군은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1945년 8월,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종전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미국은 대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초 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전쟁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연합군은 국제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을 설립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와 같은 고립주의에 묻혀있지 않고 세계에 대해서 책임을 갖고 국제연합 속에서 상임이사국의 하나로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오늘날의 미국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연합군으로서 함께 싸웠으나 얼마 안 가서 양국을 비롯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과의 사이에 '냉전'이라 불리는 상태가 일어났다. 대전 후 소련은 대전 중에 점령한 여러나라의 공산화를 추진했다.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이러한 소련의 움직임을 위협이라고 느끼고 1947년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하여 내외로부터 전체주의의 위협하에 놓여있는 자유주의 여러나라에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를 선언했다.
트루만 정권의 국제대회정책은 1952년 선출된 아이젠하워에 의해 이어졌다. 국무장관 델레스는 종래의 '봉쇄정책'에서 보다 적극적인 '반격정책'을 취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 군사기구에 위해 세계적 규모의 반소 군사체제를 형성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이 강경한 덜레스 외교는 소련의 평화공세에 직면하여 한계에 다다랐다.
아이젠하워 정권 하의 역사적 사건의 하나는 1954년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에 위헌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그 이후 흑인운동은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지도자 밑에 결집하여 연좌, 데모행진을 실행하였고 불매운동 전술을 이용하여 차별대우나 권리부정의 사건을 법정에 끌어들여 싸웠다. 이 흑인운동은 1968년 한여름 약 20만 명의 흑인이 참가한 '워싱턴 대행진'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특히 공민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입법계획은 존슨 대통령에 이어져 1964년 공민권법이 이루어졌다. 이 법에 의해 모든 공공시설, 고용, 노동조합에서의 차별대우는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또 아직 흑백분리를 계속하는 학교에는 연방정부로부터의 보조금 지급을 중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나아가 흑인의 참정권이 실현되었고 1964년의 선거에는 수백만의 흑인이 투표하여 정치에서의 흑인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웃나라 쿠바에서는 1959년 1월 카스트로에 의한 혁명정권이 수립되어 설탕을 중심으로 쿠바경제를 지배하고 있던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62년 10월 미국은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를 정찰하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단행했기 때문에 미소관계는 극도로 긴장상태에 빠져 핵전쟁의 위기를 가져왔다. 이 위기에 즈음하여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미사일기지 철거를 요구했고 후르시초프의 양보로 핵전쟁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63년 미국, 영국, 소련은 부분적인 핵실험방지조약에 조인하고 지하실험을 제외한 모든 핵실험을 금지했다. 또 케네디는 우주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국은 1957년의 소련의 수푸트닉(Sputnik)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 뒤져있었으나 아폴로계획에 의해 1969년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성공시켜 우주개발 면에서도 앞서게 되었다.
1950년대, 1960년대를 통해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과 평화공존정책을 진행시켜 왔으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직접 군사개입을 피할 수 없는 국면에 처해 있었다. 아이젠하워 시대에 이미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케네디 시대에는 월남전쟁 개입 직전까지 군사원조가 증강되어 있었다. 그리고 1964년의 통킹 만 사건 뒤, 존슨 대통령은 월남에 미국군을 투입하였고 북폭이 시작되었다. 1973년까지 100만 명이 넘는 군대가 월남에 파병되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국내 여론은 처음에는 월남 원조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나 점차 반전의 기운이 고조되어 많은 정치가, 지식인, 저널리스트 등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반전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은 마침내 1973년 11월 평화조약에 조인하고 월남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1971년 헌법 제26조가 수정되어 18세 이상인 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 소련을 공식 방문하였고 미국외교사에 역사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러나 1973년 워터게이트사건이 발각되어 2년 동안에 걸친 보도기관이나 상원의 조사 결과 닉슨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76년 건국 2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그 뒤로 내정, 외교 모두 낙관을 불허하는 상황에 있다. 특히 자원, 에너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 시야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선출된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지지기반의 약화와 낮은 국민적 신뢰도로 정책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이란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시아파 세력 주도의 1979년 11월 미국인 인질사건발생 및 미군에 의한 구출작전 실패로 카터 대통령과 미국의 위신이 추락하고, 국민들은 카터 행정부를 비난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의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되었다.
1981년 취임한 로날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대통령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추진하였지만 이는 재정적자를 가속화하는 부작용을 수반하였다. 한편, 대외정책에서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이후 1980년대의 보수적 분위기에서 1988년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George H.W.Bush)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후에도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의 악화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미국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 상승하였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 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였으나, 클린턴 대통령은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외교정책 목표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대를 표방하고 이를 위해 인권신장 비확산, 테러문제 해결에 주력하였다. 탈영전기 대의개입을 자제하면서도 코소보사태에 개입하고, 핵문제 관련 북한과 합의를 하였으며, 대 이라크 제재를 주도하였다.
냉전의 종식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항공기를 활용한 대규모 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지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는 대테러전을 본격 수행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 (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하였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가운데 2008.11.4 실시된 선거에서 민주당 버락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 후보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2009.1.20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또한, 적극적·전향적 대외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11.7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후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으며,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2017.1월 취임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11월 재선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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