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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으로 보는 통일 시나리오 본문
남북 통일은 어떻게 이뤄질까? 어느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통일과정에서 너무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남북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수들이 있고, 밖으로는 주변 4강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태도가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미래학자인 손현주 박사가 2020년 백두산 대지진을 계기로 2030년 통일이 이뤄진다는 가정 아래 남북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그려봤다. 손 박사는 지난 2012년 미국 하와이대에서 <2030년 남한의 대안적 미래 시나리오>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 기획연재 '통일대박론을 넘자' 제3편 '새로운 한반도를 상상하자'(2014년2월20일)에 시나리오 저자가 직접 기고한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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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도 어려움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경제가 주도적인 경제시스템이 되면서 주민들의 비판의식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비판적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다가, 다시 보수파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나마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북쪽 주민들의 인터넷, 스마트폰 사용 덕이 컸다. 북쪽 당국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외부접촉을 제한하려 했지만, 언제나 그것을 뚫고 나가는 사회의 기술변화가 더 빨랐다. 이에 따라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처한 위치를 알게 되는 북쪽 주민들이 더욱 늘어났다. 한국남씨도 그 즈음 북쪽에 있는 친척,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곤 했다. 한씨가 그 통화를 통해 북쪽 소식을 알게 됐고, 북쪽의 친척과 친구들 또한 남쪽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깨어난 민심이 중국의 개방 압력과 함께 북쪽 지도부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힘이었다.
2030년 2월20일 국민투표장
하늘에선 함박눈이 내렸다
오늘이 바로 8천만 온 겨레가
통일한국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다
탈북자 한국남씨는
투표용지 찬성에 기표를 했다
마음은 고향 함경도로 달려갔다
북쪽의 경제발전 전략은 2013년부터 본격화한 개방정책, 특히 북-중 국경지역 개발전략에 근거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거의 중국만이 투자를 했다. 그러나 곧이어 남쪽 자본이 들어왔다. 그러자 러시아, 일본 등의 자본이 에너지, 광업, 통신, 인프라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초기에 투자를 많이 한 중국이 쥐고 있었다.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특구를 중심으로 북쪽 땅을 상당히 사들이기까지 했다. 북쪽 경제의 중국 예속화에 대한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북쪽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2020년에 들어서서 5%대의 안정된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 역시 이 과정에서 불평등 심화를 경험한다. 특히 도시화에 따른 도농격차가 커졌다. 이런 불평등의 정점에는 북쪽의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많은 이권을 챙기면서 여전히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북쪽도 식량과 자원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소득재분배가 문제가 되는 사회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북쪽은 경제적으로 동북아지역에서 낙후된 지역이었다. 성장률이 10% 이상씩 치고 나가야 다른 나라를 빠르게 추격할 수 있을 텐데, 5% 남짓한 성장률로는 다른 나라를 쫓아가기 버거웠다. 중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최대가 되는 지점까지만 투자를 하고, 남쪽 역시 분단이라는 제약 아래서 투자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북쪽 주민들과 지도부도 뭔가 획기적으로 투자를 늘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두산 대지진이 일어나고, 남북이 빠르게 통일이라는 비전에 합의해 나가게 된 것이다. 2021년 11월 남북은 중국과 미국의 양해 아래 통일한반도 건설을 천명했다. 2022년에는 통일 준비를 실행할 ‘한반도통일공동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는 정부, 정당, 기업체, 시민사회, 국제기구를 대표하는 50명으로 구성된다. 이 기구는 남북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대통합 원칙과 전략을 이행할 통일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 핵심 열쇳말은 ‘새로운 건설’이었다. 상향식 방식에 근거한 민주적 절차, 새로운 정치체제와 헌법, 북쪽의 현대화와 남쪽 정치지형의 획기적 전환 등에 남북이 합의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1국3체제’를 실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남북은 1단계인 교류·협력·화해 과정을 거쳐, 2단계로 기존 남북 체제와 함께 비무장지대에 ‘평화행정구역’을 설정하는 1국3체제를 실험하기로 한다. 이 실험을 거친 뒤 3단계로 완전통일 국민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통일1단계는 남북이 적대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시기였다. 통일은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는 단순한 체제논리가 아닌 것으로 인식됐다. 북쪽도 변하고 남쪽도 새로워져야 한다. 이를 통해 통일한반도가 세계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통일공동위원회는 통일 경로에 대한 비전과 정책개발을 위하여 ‘범국민적 통일시나리오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동아시아의 부족한 전력문제를 위해 남북과 러시아, 몽고, 일본, 중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전력협력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이를 통해 북쪽은 만성적인 전력난을 해소해 나갔다. 북쪽의 경제회복을 위한 ‘북한재건 프로그램’이 실시됐고, ‘국가정체성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서 남북의 문화, 정체성 차이를 줄이고 사회통합을 꾀했다.
통일2단계에서는 과도기적 정치체제로 ‘1국 3체제’를 실험했다.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연방제를 어떻게 합칠 것인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비전이 갑론을박의 논쟁을 통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 결과가 ‘1국 3체제’였다. 통일 이전까지 남북이 각각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제3체제로 시장경제나 계획경제와 전혀 다른 사회구조와 가치를 추구하는 ‘비무장지대 평화행정구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구역에는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통일신탁기금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남북 총선거에 부칠 통일안이 마련됐다. 통일 3단계인 완전통일 중립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비무장지대 평화행정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남북 주민들의 통일 열망은 더 커졌다. 경제민주주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중심으로 경제제도를 짜고 성, 계층, 세대, 지역별 차이를 없애 나가는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안을 만들었다. 군 병력은 160만명에서 30만명으로 감축하면서, 군사비를 줄이고 생산적인 산업투자를 늘리자는 것이었다.
한국남씨는 그 통일방안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그리며 기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통일은 분명 많은 것을 변화시키겠지만, 유토피아는 결코 아닐 것이다. 내부적으로 남쪽 주민 중 일부는 다수결을 중심으로 남쪽 의중이 반영된 집단편향적 의사결정을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북쪽 주민들 일부는 이런 모습을 비판하며 중국, 러시아 등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어쩌면 국제사회의 견제도 더욱 커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도 남과 북이 힘을 합친다면 뚫고 나가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씨는 투표 용지 찬성란에 꾹 눌러 기표를 했다. 통일한반도가 새로운 가치 창출이나 경제성장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평화국가로서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온전히 담았다. 그리고 마음은 벌써 함경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손현주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미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