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사차원 소녀의 티스토리 블로그

정도령은 누구일까...정감록 본문

격감유록, 천부경, 송하비결, 정감록

정도령은 누구일까...정감록

천아1234 2021. 10. 3. 19:51

한민족의 비결서 정감록(鄭鑑錄)은 근 오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살아왔다. 오늘날에도 서양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집과 더불어 쌍벽을 이룰만큼 대표적인 한국의 비결서지만, 정작 우리들에게 알려진 내용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집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정감록에 수록돼있는 내용 때문이다.

 

 

현 정권의 붕괴와 전대 미문의 대재앙, 정씨 진인(정도령)의 출현과 새로운 정권의 창출등을 핵심 키워드로 담고있는 이 책이 정권을 장악한 주류 정치세력에게 이쁘게 보일리 만무했다. 결국 이 책은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불온서적' 내지는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유해매체' 정도로 분류되어 조선왕조와 일제식민시절 내내 금서(禁書)로 묶이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읽고 싶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고 봤더라도 봤다고 떠들고 다닐 책이 아니었으니 지금처럼 내용이 쉽게, 그리고 널리 퍼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불순한 내용을 담고있는 정감록의 파장을 우려한 지배세력들은 이 책의 확산을 막는 데 올인했다. 순진한 일부 백성들이 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맹신했고, 미륵신앙과 마찬가지라왕도정치를 갈아 엎자고 일어설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정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은 덕에 호기심 충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책은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또 부패한 정권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깊어지는 때일 수록 새로운 세상을 천명한 이 책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그 결과 집권세력이 우려했던 파장도 나타났다.    

 

 

 

1589년 

선조 22년, 계룡산을 근거로 정씨가 일어난다는 정여립 역모사건

 

1628년 

인조 6년, 정씨 진인이 나타났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북인을 처벌한 사건

 

1739년 

영조 15년, 평안도, 함경도에 널리 퍼진 정감록을 수거해 불사른 사건

 

1783년 

정조 6년, 정감록의 유통,열람을 금지한 사건 

 

1894년 

정감록에 나오는 부적 궁을(弓乙)을 살라먹고 전주성을 공격한 동학군 사건

 

1920년대
rn정감록의 계룡산 천도설을 바탕으로 6백만의 신도를 모집한 보천교 사건

 

 

 

하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못보게 막고, 탄압하고, 불살라도 정감록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감록 사상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한 불순 분자들(?)에 의해 정감록은 역사속에서 불쑥 불쑥 고개를 쳐들곤 했다. 오랜시간 정감록은 지배계층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되는 불면증
rn인자였고 치료해도 쉽게 죽지않는 헬리코박터균이였다. 
이렇게 끈질기게 지배계급을 괴롭힌 정감록은 과연 어떤 책이었을까? 

 

 

정감록은 조선초기부터 등장한 대표적 예언서로 정몽주의 조상 정감과 이성계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 세 사람의 대화록형태로 씌여있다. 물론 실제 대화내용이 아닌 누군가가 지어낸 가상의 대화 내용으로 실제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금서의 특성상 입소문과 몰래 베껴쓴 필사본으로 전해지다보니 수 십가지의 이종(異種)이 존재하고 있다. 이 다양한 버전들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코드를 추려보면 대략 이렇다. 

 

 

 

   

 

  

 

"머지않아 전쟁, 흉년, 전염병같은 여러 형태의 재앙이 이 땅을 덮치고 지금의 왕조는 멸망한다. 이 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식구들을 데리고 십승지로 통칭되는 길지(吉地)로 피해라. 환란의 끝에 정(鄭)
rn성을 가진 진인이 나타나 계룡산에 도읍을 마련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태평성대가 찾아오고 상하(신분질서)가 뒤바뀌며 새로운 왕조는 세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신분차별의 세상, 강자독식 세상, 상명하복의 세상이 뒤집어지고 민중들의 세상이 열린다는 거다. 현실에 염증을 느낀 백성들에게 이 사상은 그 자체로 해방구였고 카타르시스였다. 그들은 정감록에서 희망를 보았던 것이다. 가히 혁명적인 내용들로 구성된 정감록의 예언들은 실제로 얼마나 적중했을까? 많은 예언들이 상징, 비유, 일반적 묘사로 일관한 덕에 확인하기 쉽진 않지만 현대들어 재 해석된 대표적 예언들을 모아봤다. 이 사례들을 통해 정감록이 싸구려 예언집인지 아니면 신통력있는 예지인지 각자 판단해보자.  

 

 

<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같이 대치하리라>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남북한과 UN군, 중공군등은 사상유례없는 물량공세 속에서 끔찍한 대량학살을 벌였고 그 무대가 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호랑이 해였다. 그리고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한 1951년은 정감록이 말한 토끼해였다. 이후 남북의 대치 상황은 위 묘사처럼 팽팽한 긴장속에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8월경 인천과 부평사이에는 밤중에 배 1,000척이 들어오고 경기도엔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한강 이남 100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지고 인적도 사라질 것이다>

 

 

남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국군, 연합군 7만 5천명의 병력을 수 백척의 함대에 싣고 인천으로 기습상륙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인민군 2만 병력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치고 인천을 접수한 연합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했고 서울 중앙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정감록의 예언대로 작전이 시작된 시간이 아직 해가 뜨지않은 새벽 5시였고, 전투가 종료된 9월 26일은 음력 8월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는 당근 인천이었고 서울 진공의 요지가 부평이었다. 이 작전으로 허리를 끊긴 인민군들은 남한 지역내에서 치열한 빨치산활동을 전개했다. 정감록이 예견한 한강 이남 100리까지 인적이 끊긴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살짝 소름돋는 부분이다.
rn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것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모두 도둑의 소굴이 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하던 국군과 UN군은 압록강을 건너 갑자기 나타난 30만 중공군(오랑캐) 대 공세에 밀려 전멸 위기에 처한다. 치명적 궤멸을 당하면서도 적의 포위망을 뚫은 국군과 미군 10만명, 피난민 10만명이 흥남철수로 탈출에 성공한 이후, 평양을 탈환하려는 중공군과 지켜내려는 연합군간의 전투와 항공폭격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는 불바다가 되었다. 원한 맺힌 피가 산처럼 흘렀다. 

 

위 글에 나온 금강산 서쪽, 오대산 북쪽은 당시 동부전선으로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가장 치열한 고지전과 공방전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위 사진의 중공군 최대 남침선(4)과 휴전협정 조인시(5)까지 전선의 변화를 보면 동부전선의 이동축이 가장 컸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의미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공비들의 끊임없는 출몰로 화전민 소개령이 내려졌다. 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승지중 하나인 예천 금당)

 

 

<재앙이 덮쳤을 때, 십승지로 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십승지는 풍기 금계, 예천 금당,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마곡, 목천, 진천, 봉화, 두류산, 태백이다>

 

 

실제로 정감록의 예언에 따라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지역에선 전쟁기간 내내 총소리 한 번 들어보적 없고 군인 한 번 본 적없다는 증언들이 적지않다. 한국전쟁때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에 점령된 사실이나 십승지 대부분이 경상도 지역에 있다는 건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감록은 재앙이 왔을 때 한반도의 서북지방, 수도권,강원도를 피하고 계룡산이나 경상도 지방으로 피하라고 코치하고 있다.

 

 

 

<정씨 진인(정도령)이 올 때가 되면 계룡산 아래 초포(草浦)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들락거린다> 

 

 

초포는 계룡산아래 작은 포구로 토사가 쌓여 배의 통행이 불가능했던 곳이다. 하지만 1990년 금강하구 제방공사로 유량이 증가해 이젠 작은 배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또한 공주시 계룡면의 <무너미고개>만 정리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초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정도령이 올 시기가 되가는 건가? 

 

 

<곤륜산의 내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개성)으로 옮겨졌다. 송악이 쇠하고 천운이 막히면 다시 한양으로 넘어간다. 이후 도읍은 계룡산, 가야산으로 옮겨간다>

 

 

평양은 고조선의 활동무대, 개성은 한때 고려의 수도였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역대 왕조의 수도는 정감록이 예언한대로 계속 남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감록에서 다음 도읍지로 지목한 계룡시는 <신 행정수도 건설 추진위원회>가 고려했던 행정수도 이전 후보지 4곳 중 하나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계룡산에는 신도안(新都案)이란 지역이 있다. 한자 뜻을 풀어보면 새로운 도읍 예정지라는 뜻이 된다. 이 신도안에 대한민국 국군의 콘트롤 타워인 육,해,공 삼군본부(계룡대)가 들어섰다. 나름 국방의 수도라 할 만하다. 또 신도안은 박정희 정권시절 북한의 재침위협에 대비한 수도이전 후보지로도 심각하게 검토되던 지역이었다. 비록 박정희 암살로 실행이 중단되었지만 계룡산에 대한 500년전 예언이 피식 웃고 넘길만큼 허황된 얘기는 아니란걸 알 수있다. 이 예언대로라면 서울 -> 세종시 -> 계룡시 -> 가야산 방향으로 국가의 중심이 이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거창에 미리 땅 좀 사둬야하나?

 

 

 

   

 

   (거창과 성주사이에 자리잡은 가야산)

 

 

 

한때 정도령이 나타났다고 해서 세상이 들썩인 적이 있었다. 1992년 제14대 대선때 기호 3번 통일국민당 대선후보로 나선 이가 바로 주영(鄭周永)이었다. 최초의 정씨성을 가진 대선후보로서 그의 출마가 정감록의 예언과 함께 화젯거리로 오르내렸지만 결국 그는 김영삼, 김대중의 벽을 넘지못하고 16.3%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정동영 후보가 대선주자로 나섰을 때에도 이 주장은 부활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만드는 사례들이다.

 

  

 

아직 많은 예언들이 해독불가 혹은 미실현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감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봉인속에 갇혀있는 셈이다. 하지만 진짜 봉인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온 정감록 이전(異傳) 50여종 중 우리가 읽어볼 수 있는 정본(正本)은 그 절반인 25종에 불과하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 정본 25종이 1923년 2월 15일 식민시절, 일본인 학자 호소이에 의해 최초로 출간되었다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당시 일제 식민통치 논리를 강화하고 조선민중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꺽기위해 특별한 검열기준하에 수집된 것들이라는 거다.  

 

 

 

즉, 애석하게도 우리가 보는 현재의 정감록이 선조들이 읽던 그 버전인지 아니면 일본인 호소이에 의해 덧씌여진 소설인지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 탄압받던 한민족 최고의 예언서 정감록이 제국주의 지배자에 의해 최초로 출간됐다는 것은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훨씬
rn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버전들은 호소이의 정감록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뒷 골 땡기는 시추에이션이다. 

 

 

우리에게 정도령의 출현이나 계룡산 왕조의 탄생보다 더 시급한 건 지금도 정감록을 옭아매고 있는 이 역사의 봉인들을 하루라도 빨리 걷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