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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풀리지 않았던 의문? 무기고 탈취! 출처: 올인코리아 본문
5.18, 풀리지 않았던 두 가지 의문(정재학 전남 자유교원조합 고문)
(첫번째 의문)
1980년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그것도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으로서 소위 늙은 대학생이었다. 공부보다는 문학에 취하고 동기들과 몰려다니며 술에 취해 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학도호국단 간부 선거에 3학년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봄은 데모로 시작되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어용으로 몰기도 하고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날을 새우기도 하였다. 무엇을 정확히 알고 하는 데모라기보다는 몰려다니니 재미가 있고, 밤새워 교실에서 날을 새우는 새로운 분위기에 낭만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학도호국단 소속 간부들이었다.
정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가 잡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의 12.12 사태는 분명 군부 통치의 연장선상이었다. 아무래도 이에 대한 전면적인 국민의 저항이 필요하던 때였다. 야당은 분명 국민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당시 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지휘하고 있었다.
후일 밝혀진 내용이지만, 호남에서의 학생 데모는 김대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회장 이하 몇 인물들이 김대중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 후 데모는 교내를 벗어나 정치색을 띠며, 도청 앞 분수대로 옮겨갔다. 구호는 ‘민주 회복’과 ‘전두환 물러가라’였다.
당시 서울은 시내버스가 불태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광주는 촛불 뿐이었다. 데모는 그렇게 평화로웠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 농사를 도와주러 시골에 있었다. 5월 16일 후배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전화가 왔다.
그 길로 광주로 갔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은 이미 살육의 현장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군대를 금방 다녀온 나는 그 군인들이 얼마나 강한 전투력으로 무장된 자들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곤봉을 맞은 학생 몇이 터미널 벽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는 머리에서부터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어느 공수부대원은 팬티 차림으로 도망가는 학생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날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나왔다.
학생가방을 들고 있던 나는 터미널 곁 아시아극장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양쪽이 포위되어 있었고, 최루가스는 자욱하였다. 그때 양동 사는 동명이 엄마라는 분의 도움으로 부부행세를 하면서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보았던 참혹한 장면,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잔혹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었다. 대학 앞 하숙집을 뒤지는 통에 우리는 지붕에서 밤을 맞았다.
며칠 후 나를 비롯한 후배들은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가 현장에 없었지만, 나는 아웃사이더로서 냉정하게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의문을 아직까지 품고 있었다.
1. 그 많은 무기고가 어떻게 한꺼번에 털릴 수가 있는가. 시민군의 무장을 위해 무기고가 털린다는 것은 이것은 정상적인 시민들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엄중하게 지켜지는 무기고가 그것도 한꺼번에 털릴 수가 없다. 사전에 무기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아는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군 장갑차가 아세아 자동차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극비에 속한다. 어떻게 이를 알고 탈취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장갑차를 운행할 수가 있는가. 숙련된 군 기갑병 아니면 몰 수 없는 장갑차를 시민들이 몰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정재학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사무총장,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wps논설위원, ptimes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5.18, 풀리지 않았던 두 가지 의문( 2부)
(두번째 의문)
2. 두 번째로 풀 수 없는 의문은 교도소 습격이었다. 당시 광주는 그 많은 무기들이 시민군 손에 들어갔어도 상점 하나 약탈당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민군들의 시민 의식과 의기(義氣)는 아름다웠고, 서로서로 따뜻하게 돕고 단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5월 21일 12시경에 APC.등 차량 9대를 앞세운 무장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하며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였으며, 광주교도소를 경비하고 있던 31사단 96연대 2대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진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5.18관련 심문 조서를 보면,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는 이러한 북한의 지령에 비추어 광주교도소의 습격이 제5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1일 16시 30분경에 당시 전남대에서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던 3공수여단을 광주교도소로 긴급 출동시켰다.
1920분경, 광주교도소에 출동한 3공수여단 병력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교도소 주변에서 방어용 바리케이트 설치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교도소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총격을 가하여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다.
5월 22일, 오전 9시경에는 2 1/2톤 차량에 LMG를 장치한 무장 시위대 6명이 광주교도소를 총격 기습하여 상호간에 총격전이 일어났고, 10시 20분경에는 소방차를 탑승한 무장시위대 10여명이 교도소에 총격을 가해왔다. LMG는 군대 소대 화기분대가 보유하고 있는 기관총으로서 중무기이다. 과연 누가 이런 무기를 다룰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총이라면 몰라도 총탄까지 장착한 차량이 나타난 것은 누가 보더라도 그건 시민군일 수 없었다.
5월23일 10시 20분경에도 소방차에 탑승한 4명의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교도소를 경비하던 3공수여단에게 전원 체포되었고, 19시경에도 무장시위대가 계엄군에 총격을 가하면서 교도소를 습격하여 상호 총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1명이 부상하고 무장시위대 1명이 사망하였다.
광주교도소에 대한 무장시위대의 무력공격은 5월 21일을 전후하여 6차례나 감행되었는데 광주교도소에는 당시에 간첩 및 좌익수 170여명을 포함하여 2,700여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교도소 습격이란 단순히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일만이 아니라 사회질서와 국가체제를 뒤집으려는 피의 폭동을 유도하는 일이었다. 흉악범으로 종신형이나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 그리고 붙잡힌 좌익들이나 간첩들이 교도소를 나오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그 죄수들을 풀어서 무기를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을 모를 광주시민들은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일부 시민군들을 선동하여 이끌고 차에 태워 교도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섯 번을 했다는 것은 누군가 집요하게 지휘하고 선동을 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분명히 교도소 습격 문제는 광주 시민들의 명예에 관한 문제이다. 지금도 광주시민들은 이 문제로 인해 일부 사람들로부터 폭도란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였는가를 밝혀야 한다. 나는 지금도 단언하지만 광주시민들이 그랬을 리 없다고 확신한다.
시민군들 손에 주먹밥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잔혹하게 당하는 젊은 우리 아들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왔을 뿐이다. 시민군들도 너를 지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을 뿐, 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이 퍼줄을 맞추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탈북군인단체에서 펴낸 ‘5.18 화려한 사기극’이라는 북한 특수군의 광주 침투를 다룬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의 조각을 맞출 수가 있었다.
이 두 개의 의문에 대한 정답은 북한 특수군이었다.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그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생각과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광주 상황이 북한으로 전송된 것도 얼마나 많은 북한 특수군들이 내려왔느냐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절대로 수많은 무기고가 털리고 교도소를 습격한 것은 광주시민들의 생각과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북한 조종했던 제주 4.3사건의 재현(再現)이었고, 여순반란사건의 재생(再生)이었다. 변함없이 적화(赤化)를 노리는 북의 소행이었다.
정재학(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사무총장,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wps논설위원, ptimes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광주사태] 5.18 광주사태 31주년입니다 (광복군 네티즌 논설가)
(편집자 주: 이 글에서 '폭동'이란 말을 '사태'로 바꿨다. 아직은 가치중립적 시각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냐 군중폭동이냐의 관점은 앞으로 더 치열하게 논쟁되어야 하며, 이제 광주사태의 '민주화 운동적 속성'과 '군중폭란적 속성'은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취사선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 많은 국민은 폭동과 민주화 사이에 있다.)
광주사태(필자는 '광주폭동'이라고 씀)의 그날이 온다. 김대중의 선동 하에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원들과 각종 친북좌파들이 난동을 부린 5.18 광주사태 31주년이 도래하고 있다.
친북 주사파들은 광주사태 31주년에 때맞추어서 노무현 추모행사를 기획 중에 있다. 친북 주사파 세력은 전교조의 시국선언 준비와 노무현 추모분위기 조장 등 광주사태 31주년에 이어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인 음모를 기획하고 있다 한다. 유비무환이라했다. 광주사태 31주년에 때맞추어서 친북반역세력이 일으킬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다. 또다시 폭동과 광란의 그때로 사회를 되돌릴 수는 없고, 되돌려서도 안 된다.
광주사태..... '광주폭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한 것은 순전한 정치적 논리였지, 사태의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주폭동'이 1993년 정식으로 광주민중항쟁, 광주항쟁으로 변하고 95년에 민주화 운동이 됐다. 이는 김영삼 정권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전두환, 노태우 등의 정적 죽이기식 역사 뒤집기에 지나지 않았다. '광주폭동'은 진실규명 없이 김영삼 정권의 정적숙청 및 지역감정 해소 등의 목적에 의해 임의로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했다.
5.18 광주사태! 광주사태는 과연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하였을까? 광주사태는 우선 자칭 시민군이 먼저 군부대와 경찰서를 선제공격했다. 보안사령부에 연금당한 상태에서도 이런 놈들과 타협할수 없다면서 사람들을 자극, 선동한 저 도요타 김대중의 엽기적인 행각이나, 김정일이 보낸 인민군 특수부대원 600~800명의 정체까지 규명되지 않은 마당에 '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승격시켰던 김영삼의 행각은 성급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했다. 광주폭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없다.
광주사태는 쇼다. 5.18 광주사태는 그저 김대중 슨상님 광신자들과 친북세력, 북한 김정일 괴뢰도당이 삼위일체가 되어 벌인 반사회적 내란이자 국가전복 폭동에 불과했다. 5.18 광주사태! 광주사태에 대한 역사왜곡 때문에 학생들이 현혹되고 있다. 이런 기념할 만한 가치도 없는 5.18 광주사태를 기념하려는 의도가 뭘까? 5.18은 기념할 만한 가치는 있을까? 광주사태 31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동시에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광주사태 기념을 가장하여 선거전 막판 음모를 꾸미려는 치졸한 정치광신자 집단의 추한 반란, 역적모의를 사전에 차단해야 할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광주사태를 반공민주화 운동이라 부른다. 그러나 5.18 광주사태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해 나가다 보면 우리는 반미주의라는 키워드와 마주침을 알수 있다. 뒤에 1980년서부터 1994년까지 발생한 미국대사관, 미국문화원, 미국인 여행객 등에 대한 무차별, 무분별한 반미테러의 원인이 된 광주폭동을 어떻게 반공민주화 운동이라 할수 있는지...
5월 18일 새벽 6시, 자칭 시민군이 광주시내의 29개의 군부대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44인의 당직근무자를 살해한 뒤 병기고를 탈취했다. 그리고는 계엄군이 여고생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랐다, 계엄군이 여대생을 강간했다, 계엄군이 인육을 먹는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온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사람 공장을 파괴한다 등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들을 날조해서 확산시켰다.
폭동이 터지자 정부는 18일 9시 계염군을 내려보냈으나, 계엄군으로 편성된 31사단, 32사단 병력이 광주 상무지구에서 보병학교 병력을 만나 서로 네가 폭도라며 우왕좌왕하자, 급히 10시경에 3공수, 7공수, 11공수를 투입시킨다.
김대중의 선전 선동성 발언은 얼마나 타당한가. 5월 18일 새벽 6시 폭도들이 군경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했다. 5월 17일 새벽 0시부로 보안사령부에 의해 체포된 김대중은 가택연금당한 상태에서 폭동 발발 소식을 접했다. 연금상태에서 김대중이 선동하는 것이 옳았다면 왜 다른 야당인사인 곽상훈, 정일형, 박순천, 이민우, 유치송, 이철승, 김영삼, 김종필 등 다른 야당지도자들은 왜 김대중처럼 각자 자기 고향이나 정치적 텃밭에서 선전선동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폭동이 터진줄 알고도 이런 놈들과는 타협할수 없다고 선동했던 것이다. 김대중의 선전선동이 정당하다면 저들도 각자의 고향이나 정치적 텃밭 주민들을 선동했어야 옳다. 이미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10만명의 친북좌파 대학생들이 지상 서울역을 점령하고 난동, 깽판을 부리고 상가와 시장을 약탈하고 차량을 파괴하여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던가.
5.18 광주폭동이 터진 줄 알고 김대중은 선전선동을 했다. 보안사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도 그와같은 행위를 한 김대중이 만약 구금되지 않았다면, 저 지독한 대통령병 환자 김대중이 어떤 사태를 몰고왔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할 노릇이다. 광주폭동의 주요 지휘관은 아니지만 김대중을 연금한 것만으로도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김대중은 그 선동 지령을 통해 북한 인민군에게 남침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5.18 광주폭동이 터지자 그날 낮에 북한 김정일은 인민군 특수부대원 600~800명을 잠수탐에 태워 내려보냈다(사실 여부 확인 안 됨). 인민군은 목포와 함평 해안가로 진입했다.
친북세력은 광주폭동 당시 김대중만 보안사의 탄압을 받은 것처럼 왜곡한다. 그러나 광주폭동 당시 김대중만 연금된 것이 아니다. 5월 17일 0시부로 야당 국회의원과 당시 여당격인 공화당 의원들 대다수가 연금당했다. 그래도 김대중의 선동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김영삼이야 79년 10월의 부마폭동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고 쳐도, 연금뒤에도 아무런 소란을 안 피웠던 곽상훈, 정일형, 박순천, 이민우, 유치송, 이철승, 김종필 등 다른 야당지도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 이런 놈들과는 전혀 타협할수 없다던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세 차례나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87년 전두환에게 20억, 92년 노태우에게 20억+a 의 돈을 받았다. 이런 놈들과는 타협할수 없다? 이런 놈들과는 전혀 타협할수 없다면서 그 이런 놈들의 돈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김대중은 한마디로 자기 권력 획득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해안가로 침투한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은 남한의 친북세력에게서 입수한 군경복을 입고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한 뒤, 다시 민간인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시민군 행세를 하며 계엄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며 온갖 유언비어를 유포했다(이 부분은 아직까지 완전히 확인이 되지는 않음). 당시 계엄군은 M1, M16 소총을, 병기고를 탈취한 폭도들은 K1, K2 소총을 사용했다.
그러나 희생자들 중엔 국내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던 소련제 카빈 소총에 의한 총상이 있었다. 카빈 소총은 누가 반입했고 어떻게 쏠 수 있었을까?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은 광주사태가 진압되자 전사자들의 시신까지 수습해서 재빨리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광주 5.18 묘역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50여구의 시신이 신원불상자로 묻혀있다. 이 신원불상자들의 정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폭동 진압 과정에서는 3명의 친북한 간첩이 검거되기도 했다. 인민군 특수부대원의 세뇌공작에 전국은 공포에 질렸고, 진압은 거의 보름이 지난 5월 30일에야 종결됐다.
광주사태는 시민군이 먼저 선제공격했다. 친북좌파들은 계엄군이 먼저 학살했다고 왜곡했지만 5월 18일 새벽 6시 이전에 광주시내에는 계엄군은커녕 공수부대도 없었다. 18일 새벽부터 폭도들이 퍼뜨린 유언비어 대로라면 18일 이전에 나타난 한국군 부대가 있을텐데, 그들은 왜 그 부대의 이름을 지목하지 못하는 것인가? '광주폭동'은 시민군이 먼저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계엄군과 3,7,11공수부대에 의해 포위되자 이들은 버스와 택시를 강탈, 파괴하고 운전수를 살해한 뒤 일부 차량을 빼앗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용차량을 탈취하고는 화순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실어다가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했다.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자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우왕좌왕했고, 폭도들과 인민군은 좋다고 박수치고 노래를 불렀다. 당시 전남도청에 설치한 다이너마이트와 TNT 폭약은 전라, 충청, 경상, 제주도의 4개 도를 날려버릴 위력의 폭약이었다. 이성을 상실한 폭도들과 인민군의 행동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계엄군이나 공수부대원들도 사람인데 대규모의 폭약을 보고 두려워하는게 정상이 아니겠나?
벌써 광주사태 31주년이다. 광주사태가 발발한지 31주년이 됐다. 하필 폭동 31주년 기념일이 선거철과 맞물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교조는 4월말의 명단공개를 빌미삼아 광주사태 전에 시국선언을 준비한다고 한다. 전교조는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친노세력은 노무현 추모를 가장한 시위를 준비한다고 하니, 그 뒤에 이어질 것이 뭔가를 잘 살펴야 되겠다. 친북세력들은 광주폭동 31주년 기념행사도 대대적으로 준비한다고 한다. 그보다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저 친북 주사파, 정치 광신도들은 무슨 추악한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
벌써 5.18 관련단체들은 각 정당사회단체에 광주사태 31주년 기념 홍보물과 책자를 뿌리고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전국에 산재한 친북 반역자들의 재결집을 호소하는 신호탄은 아닐까?
광주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 5.18 광주사태의 진실은 이후 광주사태 당시 경찰관 15명을 사살했다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 윤기권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윤기권은 1992년 2억원의 보상금을 받은 뒤, 참조국과 진정한 수령님을 찾아 북한으로 넘어갔다. 자유를 찾아서 넘어오는 김모씨, 여모씨 일가의 모습을 보고도 북한으로 월북할 생각을 했다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하고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광주사태는 반미 테러와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광주사태는 이후 1980년 8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남한 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미국 대사관 방화사건, 미국인에 대한 폭행과 구타, 테러 등의 사태를 유발하는 등의 영향력을 미쳤다. 그만큼 광주사태는 폭발력과 파급효과가 크다. 광주사태 바로잡기를 통해 친북 반역세력 척결의 밑거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단결할 일이다. 친북 반역세력들이 5.18 광주폭동 31주년을 전후해 온갖 음모를 꾸미는 마당에 보수 우파들이 분열해서야 쓰겠는가? 우파 후보자들의 후보단일화를 반드시 추진해야 되겠다. 친북 주사파들의 깽판에 대비하여 우파 후보자들의 후보단일화도 필요하다면 필요할 것이다.
선거철을 앞두고 전교조와 친북 주사파 노빠들이 총동원되어 어떤 음모를 꾸밀지 우려스럽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후에도 분열과 분란과 깽판을 조장하는 추악한 악마 같은 위인들이다. 그런 마당에 우파인사들 간에 반드시 후보단일화를 추진해야 되겠고, 광주사태 전후, 미구에 벌일 친북세력과 김대중 광신자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봐야 되겠다. 민주화운동으로 미화된 폭력반역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할 때가 됐다. 5.18 광주사태 31주년이 코 앞에 다가왔다. [광복군 네티즌 논설가]
http://allinkorea.net/bbs.html?Table=ins_bbs2&mode=view&uid=7860&page=1§ion=
4.19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 (광복군 네티즌 논설가)
미완의 혁명? 혁명으로 미화되었던 4.19! 4.19 사태는 절대성역인가? 4.19는 친북세력과 일부 야당인사들이 말하듯 미완의 혁명도 아니었고, 이박사를 축출한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박사는 시위대와 면담한 후,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못하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라며 스스로 용퇴했다. 이박사는 자신을 위한 부정선거가 아님에도 스스로 책임을 졌다.
4.19는 좋게 봐서 의거이다. 일부에서 4.19는 좋게 봐서 의거라 불렀음에도 친북세력은 4.19 의거라고 부른 학자를 찾아가 폭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4.19 혁명의 이면에는 의거라 부르기 조차 부끄러운 이면이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4.19로 사퇴한게 아니라 4.19 사태의 파편에 맞고 정치적으로 몰락한 것일 수 있다. 이 4.19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지나치게 마녀재판을 받아왔던 이승만 박사의 명예 역시 부분적으로 회복되리라 생각된다. 이승만 박사는 그 역할이나 위상에 비교해 지나치게 혹평을 받아온 감이 없지않아 있다.
1960년 4.19 의거 당시 있었던 몇가지 의혹을 제기하고자 한다. 거사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하다면 하늘앞에 만천하에 드러내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고 외치는 저 입진보 파쇼들이 정작 혁명의 이름으로 온갖 비정상적이고 타락한 과정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왜곡, 은폐, 축소시키고 있다.
역사에 성역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혁명의 이름아래 묻혀버렸던 비정상적이고 타락한 과정까지 합리화, 왜곡, 미화, 은폐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타락한 두 여중생의 죽음
4.19의 잔다르크로 알려진 두 여학생의 실체! 4월의 잔다르크는 타락한 여학생이라면..... 4.19 당시 정부와 경찰이 살해했다고 발표한 두 명의 여학생은 각각 서울에서 임신 중 출산하다 쇼크로 죽은 여중생과, 낙태도중 과다출혈로 사망한 여중생이었다.
이들을 정부와 경찰의 발포로 사망했다는 루머가 4.19 전부터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출산과 낙태로 죽었다는 사실은 밝혀지지도 않고 그대로 묻혀졌다. 4.19 잔다르크의 실체는 겨우 타락한 여자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간첩 이석 등 빨치산 활동
4.19 당시 마산 해안가로 침투한 간첩 이석 외 19명의 빨치산들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다.
이석 외 19명! 북한에서 남파시킨 남로당 빨치산들도 과연 4.19 혁명에 기여한 민주화 유공자들인가. 북한에서 남파시킨 이석 등 남로당 빨치산들도 과연 4.19 혁명을 일구워낸 민주화의 전위대원들이던가?
여기서 우리는 김일성의 주도면밀함을 엿볼수 있겠다. 이석 등을 파견하기 전에 김일성은 남한 사회의 동태를 파악했고 이승만이 퇴진당하면 그 후임자로 장면이나 장택상이라고 추론까지 내렸다.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은 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남한내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지음, 민연, 2008) 213페이지 중에서.
김주열 살해자는 누구인가
4.19 사태의 도화선인 여중생 사망의 진실이 일부 알려지자 그들은 김주열을 내세웠다. 그러나 어떻게 사망직후 거사일인 4월 19일 아침 7시 50분에 정확히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를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것도 거사일 아침에 7시 50분에 때맞춰서 말이다.
김주열을 살해한 것이 경찰이나 군인의 소행인지도 사실 의심스럽다. 사망한 곳 근처의 주둔경찰이나 부대 역시 지목하지 못하면서 김주열이 경찰이나 군인 손에 맞아죽었다고 일방적으로 우길 근거가 없다. 시위 참가자 중 그를 타살한 자가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김주열의 얼굴을 뭉갠뒤 바다에 던졌을 수도 있는 문제다. 김주열을 누가 살해했는지도 가리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4.19! 과연 혁명인가? 일방적으로 혁명으로 미화, 왜곡되어온 4.19 사태의 이면에 숨겨진 이런 추한 모습들까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4.19는 의거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이승만 죽이기 음모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이승만을 매장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4.19 혁명 운운은 치졸한 정치공세일 뿐이다. 이승만은 4.19로 사퇴한게 아니라 4.19의 유탄에 맞고 정치적으로 몰락한 것일 수 있다. 4.19가 발생한지도 벌써 51주년이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질 때도 됐다.
혁명으로 포장된 4.19의 진실을 밝혀라! 4.19는 온통 의혹투성이다. 타락한 두 여중생의 죽음을 이승만이 죽인 것처럼 날조한 자들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김주열을 누가 살해했는지 진실을 가려야 한다. 4.19 당시 침투해서 남한사회의 혼란을 조장한 간첩 이석 외 남로당 빨치산의 개입 역시 4.19를 논할 때 함께 언급되어야 할 부분이다.
의혹 투성이다. 재조명의 여지 없이 일방적으로 미화, 성역화된 4.19 사태의 진실을 이제는 가려내야 된다. 진실이 드러나기 전에는 박정희 조차 인정하지 않을수 없을만큼, 그리고 헌법에 실릴만큼 그 파급효과가 컸지만, 이제 서서히 진실이 드러나는 마당에 언제까지 4.19를 성역으로 놔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의혹 투성이의 4.19를 절대성역화하는 것은 다소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광복군 네티즌 논설가: http://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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