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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대중의 목에 걸린 '독도' 가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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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대중의 목에 걸린 '독도' 가시

천아1234 2021. 10. 1. 19:49

이승만: 1952.1.18.에 ‘리승만 라인’을 선포했고, 그 선 안에 독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는 1946.1.29. 일본정부에 하달한 지시령(SCAPIN) 677호 3항에서 “일본 영토는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구 등 4개 주 섬들과 약 1,000개의 주변 작은 섬들로 제한 한다”며 “‘웃즈로(울릉도)’, ‘리앙쿠트 락스(독도)’, ‘쿠엘파트(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킨다”고 명시했습니다.

박정희: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습니다. 1965. 5.17,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김대중: 1998.11.28. 독도를 포기하는 신-한일협정에 서명했습니다. 1999.1.6. 국회에서 토의도 하지 않고 여당의 날치기로 단숨에 통과시켰습니다. 1999.1.22.부터 발효됐습니다. 이 때 새로 그은 ‘배타적경제수역’(EEZ)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닌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3,000여척의 쌍끌이 어선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선박 및 어구 류 제조업체들이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어민들은 통곡을 했지만 당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그 어선들을 북한에 주자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대중은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이 독도를 방문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도대체 김대중은 일본과 무슨 뒷일을 벌였을까요?  

노무현: 그는 여당 부총재를 거쳐 2000.8.7.해양수산부 장관이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는 우리 주장만 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이에 당시 야당 의원들은 “장관은 한국 장관인가. 일본 장관인가” 이렇게 화를 낸 바 있었습니다. 반기문, 한덕수. 이정빈도 이들 편에 서서 일했습니다.  

2004.7.21.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이런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겠다" 일본 시사통신은 7.22일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문제에서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일본이 무슨 생각 했겠습니까? “어수룩한 데가 있다, 잘하면 되겠다!” 이런 생각 안했을까요?    

정동영: 1999년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협정의 국회비준을 촉구하면서 이를 적극 찬성하는 논평을 연일 냈습니다. “한일어업협정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한 것인데 한나라당이 독도 수호를 끼워 넣어 장외투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2009.11.6.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systemclub.co.kr
 

 DJ, 최고의 친일파-친북파-군중선동가(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이 사진은 김대중이 67세 때 몰래 일본 대사관에 살금살금 뒷꿈치를 들고 들어가 히로히토 일왕에게 참배한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박정희가 21살 때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위해 무슨 혈서를 썼다고 하나 그 사진은 얼마든지 가공해 낼 수도 있는 그런 사진에 불과할 것이며, 설사 진짜라 해도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무슨 소리를 해서라도 학교에 들어가 일본을 배우려고 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일본을 따라잡는 경제성장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67세에 몰래 일본대사관에 갔습니다. 그가 거기에 간 것은 일본에 너무 약점이 많아서라 합니다. 독도를 일본에 넘기려 한 것도 약점 때문일 것입니다. 이자는 대한민국을 북에 넘겨주려한 빨갱이요 이완용보다 더 악독한 인간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김정일 치하를 견디지 못해 일제치하를 그리워 한다 합니다. 우리 5천만을 김정일 치하로 보내려 했느니 이완용보다 더 악한 인간이지요.  

 2000.6.13. 김정일과 김대중 차내 밀담

아래 자료는 일본에서 2004.12.4일 발간된 최신의 책 [김정일 파멸의 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판사: 일신보도]. [저자: 미도 히로미찌].

이 책의 188-189쪽에는 2000. 6.15일 남북정상회담 시, 갈 때에 45분, 올 때에 45분, 계 90분간에 걸쳐 김정일과 김대중 단 두 사람이 동승한 차내에서의 밀담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책 내용]

미 CIA는 양 김의 차내 밀담 90분간의 내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포착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정일이 김대중에 귓속 말로 한 말>

남로당 입당서류와 1967년부터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의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원조에 관한 자료 등을 보이며

"이들 자금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김대중이 김정일에 주눅들어 한 말>
  
1. 생전의 김일성 수령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2. [박통시절) 납치사건에 있어서 여러 모로 힘을 써 주셔서 오늘 날의 제가 있었습니다.  
3. 광주사태로 인해서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4.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5. 남북 평화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고 싶습니다.
6.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매진하고 싶습니다.
7. 북조선에 경제재건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8.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조속히 평양에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