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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도 마땅한 지위 없인 그 말이 안 먹히는 법 본문

소설

성인도 마땅한 지위 없인 그 말이 안 먹히는 법

천아1234 2021. 7. 23. 16:02

주역의 비밀 하나를 공개한다. 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표상으로 하는 한국이 왜 역학의 땅인지를 실감하리라. 종교적인 편견은 사양한다. 우주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는 주역 철학은 본래 유교(儒敎)의 산물도, 도교(道敎)의 산물도 아니다. 일찍이 음(--)과 양(-)의 디지털 부호로 만들어진 역학을 훗날에 생겨난 유파에서 가져다 논리체계로 삼았던 것뿐이다. 기독교(基督敎)나 무슬림에서도 얼마든지 주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나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경우처럼 가져다 잘 쓰면 임자가 된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⑬

주역은 64괘로 돼 있다. 하늘을 뜻하는 건(乾) 괘로 시작해서 64번째인 미제(未濟) 괘로 끝난다. 38번째 괘가 규(睽) 괘다. 불 기운은 위로 올라가버리고 연못 물은 아래로 흘러버린다. 서로 뜻이 어긋나서 째려보는 형국이다. 상대가 혐오스러워 돼지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꼴로 보이는가 하면, 귀신이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활시위를 당겨 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놀랍지 않은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피 흘리며 싸우다 지금은 휴전선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 실상 그대로다. 39번째 괘는 건(蹇) 괘다. 아래는 산, 위는 물로서 산 넘자 물을 만난 처지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느라 절름발이(蹇)가 된 형국이다. 반백년이 지난 남북 분단의 세월은 절름발이의 파행이나 다름없다. 40번째가 해(解) 괘다. 속박이 풀리는 해방이다. 38선으로 비롯된 민족의 반목은 39의 절름발이 단계를 거쳐 40의 해방을 맞는다.

백두옹이 전에 일렀듯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은 미완의 해방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일본·미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방이다. 바야흐로 한민족의 시대가 온다. 진정한 해방의 날이 밝아오고 있다.

난세 버틸 ‘十勝地’ 한강 이북엔 없어
“어르신, 주역 38번째 괘가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 대치를 뜻하기도 하다는 건 견강부회 같네요. 예정 조화설도 아니고 그 옛날에 중국 대륙에서 성립한 주역 괘의 순서가 어찌 현대 한국사를 예상하고 정해졌겠습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강권 교수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허허허, 용역법(用易法)을 모르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백두옹은 소리 내 웃었다.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강권 교수는 단호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치밀한 논리로 토론을 이끌어온 그다웠다. 뒤얽힌 실타래를 한 칼로 내리치는 쾌도난마는 강권 교수의 특기였다.
“누가 오늘날 남북 대치 상황을 주역에서 미리 말해두었다고 했나? 개체는 전체를 반복하는 게야. 범주로 본 주역의 괘 순서와 현재 우리 상황이 놀랍게도 일치하는 것뿐이야. 소름이 안 돋는가? 우연이라거나 신비하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일치하니까 말일세.”
백두옹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64괘가 태극처럼 돌아갔다.

“놀랍기는 하네요.”
강권 교수는 마지못해 동조한다.
“자네 조부가 평안도 순천 고을에서 내려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일제 때지요.”
“그때 뭘 보고서 정든 고향을 떴겠나?”
“십승지(十勝地) 찾아서 소백산 밑 풍기로 왔답니다.”

“바로 그거라네. 십승지는 난세에 생명 보전하기 좋은 땅일세. 자네 그거 아는가? 십승지는 38선 이남에만 있지 이북에는 없다는 거.”
“네?”
백두옹의 그 말에 강권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옛날에는 38선 개념이 없었으므로 한수(漢水:한강)를 기준으로 했지. 일제 때 혹은 한국 전쟁 때 한수 이남으로 내려온 사람들 자손은 자네처럼 남한에서 잘 먹고 잘 살지만 이북에 남은 사람들은 생지옥을 면치 못하고 있네. 십승지네 감결이네 하는 게 모두 주역을 활용하는 용역법의 산물일세.”
“그건 정말 묘한데요!”

강권 교수는 탄복했다.
“그나저나 자넨 왜 그간 그렇게 뜸했는가?”
“실은 후보들 캠프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 좀 했답니다.”
그와 친분 있는 교수들 몇몇은 이미 캠프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고민할 거 뭐 있어. 자네처럼 정치 철학이 분명하다면 뜻 맞는 후보를 도와주게나.”
“전 폴리페서(polifessor)가 아니랍니다.”
“이 사람 참.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그것을 상자에 넣어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쳐줄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지. ‘고지재(沽之哉) 고지재(沽之哉) 아대가자야(我待賈者也)라. 팔고말고. 팔고말고. 나는 좋은 값을 쳐줄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가 폴리페서였을까? 지성의 책무를 다한 것뿐일세. 역에 이르되, 성인지 대보왈 위(聖人之大寶曰位)라 했다네. 성인도 마땅한 지위가 없으면 그 말이 세상에 먹혀들지가 않아.”

백두옹은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했다. 정치가 변하길 바라면 욕만 할 게 아니라 참여해서 함께 바꾸라는 거였다. 그것이 시민들이 주도하는 바람직한 거버넌스(Governance:공공경영) 체제라며.
“안철수 후보를 돕고 싶습니다. 그는 대권에 뜻이 없었는데 국민들이 부추겨서 무소속 후보가 됐지요. 정당이 없어서 홀대받고 있는데 만일 그가 실패하면 실
망할 국민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정도령이 안 후보 같기만 하답니다.”
“난 그렇게 못 박지는 않았네만 자네 소신껏 판단하소. 우리 며느리는 문재인 후보 열성 팬이라네.”
“제가 안 후보 편에 서도 안 말리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왜 말려? 불확실하지만 한국 정치사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현상이자 시도네. 안철수 후보는 이미 한국 정치 풍토를 바꿨어. 그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이렇게까지 변신하려 들지 않았을 거네. 민주통합당은 별반 혁신하는 기미가 안 보이지만 말일세.”

정치판에선 현장의 땀내 중시해야
백두옹은

 

맹자의 네 가지 정치인 유형을 들었다. 맹자는 역사를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봤다. 한때 잘 다스려지고 한때 혼란한 게 인간의 역
사다. 어느 때 벼슬자리에 나아가야 하는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청렴이 미덕인 백이(伯夷)는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 벼슬하고 혼란스러워지면 물러나 은둔했다. 그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 맹자는 그를 청성(淸聖)이라 했다.
책임감이 남달랐던 이윤(伊尹)은 은나라 때 명신이다. 그는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도 나아가 벼슬했고 어지러워져도 나아가 벼슬했다. 맹자는 그를 임성(任聖)이라 했다.

조화를 중시했던 유하혜(柳下惠)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자다. 그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도 근심하지 않았고, 도와 예를 모르는 시골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너그러웠다. 맹자는 그를 화성(和聖)이라 일컬었다.
반면 공자(孔子)는 빨리 떠나야 할 때는 빨리 떠나고 더디 갈 때는 더디 가며, 머물러 있을 만한 때는 머무르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했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를 시성(時聖)이라 흠숭했다. 주역의 요체 ‘시중(時中)의 도’를 펼친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청렴, 책임, 조화, 시중 이렇게 네 가지의 미덕 가운데 강 교수는 어느 걸 택하려오?”
백두옹이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시중이 좋겠습니다만 자격미달이지요.”

“강 교수처럼 자신의 한계를 알고서 정치판에 나아간다면 무리수를 안 두겠지. 교수들은 대개 현장을 잘 몰라. 그래서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신념의 언어를 즐긴단 말일세. 현장의 땀내를 중시해야 실패가 없어.”

대권 후보 밑으로 모여든 이들의 사연과 성향이 다채롭다. 정당 소속에서 무소속으로, 야권에서 여권으로, 여권에서 야권으로 헤쳐 모인다. 명분은 뚜렷하다.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혁신을 위해, 국민통합을 위해.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된다.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감정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안대희 정치쇄신특위위원장과 한광옥 국민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의 갈등도 만만찮다. 출신 배경과 걸어온 길이 다르니 왜 안 그렇겠는가. 서로 같은 점을 찾고 다른 점을 다듬어 나가자면 마찰음을 피할 수 없다. 대선 과정의 조율은 당선 후 정책 실현에 도움이 된다.

원수도 마음 바꾸면 한 가족 되거늘
조선 선조 때의 경세가 율곡 이이는 시대를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으로 나눴다. 그리고 당대를 경장기로 보았다. 그는 조세 제도와 정치, 문교, 국방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출신 지역이나 붕당을 가리지 말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라 했다. 이른바 입현무방(立賢無方)이다. 역저 성학집요에는 주역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개혁안이 담겨 있다.

율곡은 규 괘의 동이이(同而異)를 취한다. 군자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반대로 다르면서도 같게 할 수 있다. 이이동(異而同)이다. 규 괘 초효는 절묘하다. 악인을 만나봐야(見惡人) 허물이 없다고 한다. 화합하자면서 악인이라고 거절한다면 장차 세상의 원망을 산다. 두 번째 효에서는 골목에서 군주를 만나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군주와 현인이 골목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몸을 낮추는 것이지 결코 도리를 낮추는 게 아니다. 여섯 번째 효는 대반전이다. 돼지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귀신이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활시위를 당겨 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적이 아니라 배필이었다. 하마터면 혼인할 짝을 죽일 뻔한 것이다.

지금 남과 북의 형국이 그렇다. 하물며 같은 나라 안에서 성향이나 소속, 세대가 다르다고 눈을 흘기며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 규(睽) 괘를 180도 뒤집으면 가인(家人) 괘다. 원수도 마음을 바뀌면 한 가족이 되고 가족도 돌아서면 남만도 못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