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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이기고도 지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네 본문

소설

무릇 이기고도 지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네

천아1234 2021. 7. 23. 16:19

일러스트 박용석

대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현룡과 황룡의 혈전은 치열하다. 굳히기와 뒤집기, 어느 쪽이 나중에 웃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론조사 결과는 오차범위 안에서 박근혜 후보가 약간 앞서거나 양측이 서로 붙은 것으로 나왔다. 앞선 쪽이나 바짝 따라붙은 쪽 모두 속이 탄다. 이렇게 되면 유혈이 낭자한 정도가 아니라 숫제 피 말리는 형국이다. 변곡점은 운명의 교차로이기도 하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21>

막판 문재인 후보의 맹추격전은 가히 눈부셨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그에게 날렵한 적토마의 이미지는 없었다. 비수를 날리는 전사의 풍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기세등등하던 안철수 바람을 야금야금 흡수해버리더니 마침내 박 후보와 대등해졌다. 구름은 여당의 몫이고 바람은 야당의 몫이다. 처음부터 구름을 몰고 다니며 용의 풍모를 자랑했던 박근혜 후보는 돌풍을 타고 날아오른 문재인 호랑이와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한다. 이로써 운종룡풍종호의 형국이 제대로 연출된 것이다. 이제 최종 승자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산업화·민주화 세력 화해가 시대 소명
2012년 12월 13일.
백두옹은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다. 지난 7월 중순, 인왕산 산책로에서 청와대 터를 조망한 지 어언 다섯 달이 지났다.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던 여름은 가고 사방천지가 은세계로 변했다. 한파가 닥쳤는데도 국가원수 묘역 햇살은 따사로웠다.

이승만·프란체스카 여사 묘소와 김대중 대통령을 참배했다. 맨 위쪽, 박정희·육영수 묘소는 훨씬 크고 화려했다. 묘 앞에서 동쪽을 조망하면 한강이 궁싯거리며 흘러 들어온다. 한겨울에도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는 김해 봉하 마을에 있어서 가보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흉탄에 쓰러졌다. 현대사의 비극이자 가문의 횡액이다. 박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는 진영에 따라 극명하게 대립한다. 산업화의 견인차 대 반민주 독재자로 엇갈린다. 그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출마해 역주하고 있다.

일찌감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박 후보의 대권가도는 탄탄해 보였다. 욱일승천의 기세를 몰아 손쉽게 대권을 쟁취할 것으로 보였다. 야권 필승카드라는 안철수의 사퇴 역시 박 후보에겐 천운이다. 문재인이 안철수 이기면 박근혜가 문재인 이긴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박 후보의 낙승이라야 맞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는 잔인하게 쓰인다. 특정인의 의도대로 호락호락 만들어지지 않는다. 박 후보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대업을 이룰 줄 알았다. 실추된 아버지의 명예를 복권하고자 했던 그는 역사관을 수정하라는 국민의 준엄한 채찍질을 받고 당혹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역사를 부인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TV 토론에서 이정희라는 아주 까칠한 복병도 만났다. 박정희의 친일 행적, 박 후보가 신군부로부터 전달받은 6억원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금기는 깨졌고 박 후보의 특권은 깨져 일반화되었다. 혹독한 담금질이었다.

백두옹은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으로 내려왔다. 때마침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1주기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철강왕 박태준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바친 기업인이자 정치가였다. 포항제철 없는 한국의 산업화란 있을 수 없고 박태준 없는 포항제철도 있을 수 없다.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해야 합니다.”
1969년 12월,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협약서에 서명한 뒤 영일만 현장에서 그가 한 명언이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은 우리의 시대적 소명입니다.”

1997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연대하면서 그가 한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선견지명이다. 정치에 발을 담가 곤혹도 치렀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몸소 실천한 것은 분명 공훈이다.
미망인 장옥자 여사는 지난 1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묘살이를 했다. 이 겨울 세상을 훈훈하게 만든 미담이다. 포스코 부인회를 이끌며 봉사해온 삶도 귀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나 나올 법한 휴먼스토리가 아닌가. 21세기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감동을 만날꼬. 백두옹이 말해온 곤덕의 사례요, 한국 여인의 바탕 심성이다.

백두옹은 무명용사의 묘역도 둘러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조국에 바친 이들이야말로 국가영웅이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고,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건지려고 꽃잎처럼 떨어져간 장병들의 희생은 눈물겹다. 아직도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엊그제 미사일 발사실험을 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새로운 리더십이 가려지는 판에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

쿠데타·중우정치가 민주주의 적
“박근혜·문재인 후보 모두 바른 인품이지. 나는 그들 배경 세력의 가치관을 보고 투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네.”
저녁 때, 집으로 찾아온 강권 교수에게 백두옹이 일렀다.
“동감입니다.”

성격 급한 강 교수는 누가 대권을 잡는지 어서 점을 쳐보고 싶을 거였다.
“그럼 약속한 대로 서죽을 갈라볼까? 인지(人智)로 헤아릴 수 없으면 신지(神智)를 빌리는 게 차선책이니까 말야. 하지만 알아두시게. 미래 예측에 100% 적중률이란 있을 수 없다네.”

백두옹은 서죽과 산통을 꺼내왔다.
“압니다. 자기실현적 예언과 실현방해적 예언! 예언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현상이 예언대로 된 현상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라죠. 예언됐으나 인간의 의지와 행동으로 그걸 무력화하는 걸 실현방해적 예언이라 하고요. 자기실현적 예언이냐, 아니면 실현방해적 예언이냐? 박근혜냐, 문재인이냐? 50%의 확률 게임이 왜 이다지 오리무중인지요. 저는 한국 정치가 그동안 보여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와 편 가르기, 진영 논리가 안타까웠습니다. 이 증오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적임자는 안철수라고 보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죠. 그런데 안철수는 끝까지 리더십이 없었고 교양적 시민세력 중심의 제3당은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해서죠. 솔직히 저는 정권교체를 바랍니다. 문 후보로 정권교체가 되어도 증오의 시대가 끝나기를 바라고요.”

“박 후보가 돼도 증오의 시대는 끝내야 해.”
백두옹은 단호했다.
“그런데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어르신께서는 박·문 후보가 모두 선하다고 말씀하지만 정치학자인 제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것은 쿠데타와 중우정치(衆愚政治·mobocracy)랍니다. 정치철학자가 가장 경계하는 독소들이지요. 이번 대선은 냉정히 말해 쿠데타 정권의 후예와 중우정치 선봉장 간의 대결입니다. 양쪽 다 민주주의의 개념과 실현방법론을 잘 모릅니다. 게다가 상대를 인정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증오의 시대를 끝내겠습니까?”
날카로운 정치학자이자 당대의 논객다웠다.

“문 후보가 왜 중우정치의 선봉장이라는 건가?”
“대중을 선동해 참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세력을 대표하니까요. 그들은 편 가르고 분열을 조장해 잡은 권력을 함부로 씁니다. 정치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걸 간파한 부동층 10%는 좀처럼 투표하지 않을 겁니다. 표심을 잡기 위해 여야가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만 눈살만 찌푸리게 할 뿐 효과가 없을 거란 말씀이죠. 저는 정치학자로서 부동층의 기권을 중시합니다. 독재자 딸이라서, 깽판 친 노무현 계승자라서 차마 찍을 수 없는 양심들이니까요. 그들은 제3당을 원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을요.”

“부동층에 그런 깊은 심지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군. 멈추고 행동하지 않는 간(艮:)괘 맨 위의 효사와 같아. 독실하게 멈춰 있으니 길하다(敦艮. 吉). 강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 표를 행사하면 자신도 모르게 진영논리에 빠지는 꼴인데? 그렇더라도 나는 한 표 당당하게 찍겠네. 찍어주고서 잘못하면 쓴소리하지 뭐. 이제 그만 괘를 뽑아보세. 신명(神命)이 어떤 답을 내리실지 모르겠군.”

백두옹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세를 바루었다. 산통에 쉰 개의 서죽을 꽂아놓고 눈을 감았다. 점의 목적을 읊조릴 찰나였다.
“어르신!”
강 교수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백두옹이 눈을 떴다.
“괘 뽑지 말죠.”

“왜? 너무 궁금해하더니….”
“어르신께서는 국민을 크게 끌어안고 보살피는 후보가 당선할 거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됐어요. 누가 돼도 저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미리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져버렸답니다. 괘를 뽑았다가 자칫 부동층에 영향을 미쳐 떨어진 쪽의 원망을 살까 두렵습니다.”
그토록 독촉하던 강 교수가 마음을 바꿔 말리고 나왔다.

“자네가 그사이 주역 철학의 본질을 꿰뚫었군 그래. 훌륭하네.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주역의 온오(蘊奧)야. 주역에 밝았던 노자(老子)가 말했다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하다고. 법구경은, 전장에서 백만 명의 적군을 이겼다 해도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이 진실로 최상의 승리자라고 했고. 여보게, 이기고도 지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네. 결과적으로 국민이 이기게 해야 진정한 리더라네. 우선 당장 자기 몫부터 챙기고 보는 약삭빠른 정치인들과 그 일당의 승리는 역사의 패배자가 될 거네. 지더라도 당당하게 져야 떳떳해.”

백두옹은 오른손을 들어 V자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