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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3) 본문
영원한 청년 몽양 여운형
영원한 청년 몽양 여운형
신문사 사장, 체육회 회장.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자리에 있는 사람이 직접 옷을 벗고 모델이 되었다는것을 상상해보세요. 그것도 1934년에. 몽양 여운형은 당시 조선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고, 조선체육회장이었습니다.
평소 스포츠를 통해 청년들의 전투정신을 고취, 독립운동을 도모하려했던 몽양은 1934년 출간된 <현대철몽운동법>에 철봉운동으로 단련된 자신의 맨 몸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49세, '여.운.형' 이름 석자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시절. 몽양 여운형은 자신의 체통보다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튼튼한 몸과 마음이 더욱 소중했던 것입니다.
"장래의 조선은 청년의 조선이다"며 청년들의 기세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몽양은 권세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아도 청년들만 보면 두려웠다고 합니다. 혹시 자신이 나쁜 본이라도 보일까 조심했던것이지요.
청년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불가슴을 안고 있다.
몽양은 해방 이후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을 다섯차례나 방문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도자 중 남북을 오고가면서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지도자는 몽양이 유일했습니다. 그 때 주변사람들은 "저쪽에서 먼저 찾아오면 몰라도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북한 방문을 만류했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의 지도자는 몽양보다 26살이나 어린 김일성이엇습니다. 몽양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통일 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 오직 최선을 다해 볼 따름이지."
강대국들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어진 한반도와 좌우로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던 몽양 여운형은 두 달에 한 번꼴로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몽양은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불가슴을 안고 있다."고 말했던 몽양 여운형. 그가 바로 그런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독립의 혁명가
자유와 독립의 혁명가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3.1운동을 기획한 선구적 실천가
1919년 2월 초 비밀임무를 띤 몇 명의 청년들이 중국 상하이를 떠나 조선 각 처<경성, 평양 등>와 일본 도쿄로 향합니다. 이들의 임무는 조선의 민족인사들과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을 위해 김규식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하고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궐기운동을 도쿄에서 2월 초에, 조선에서는 3월 초에 실행도록 만드는것이었습니다.
이 노력으로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합니다. 2.8 독립선언서에는 국내에서 궐기를 준비 중이었던 민족인사들에게 전해지고, 2.8 독립선언 때 모인 도쿄 유학생 600명 가운데 359명이 조선으로 들어와 이후 벌어질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드디어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1년여에 걸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으로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3.1운동을 촉발시킨 청년들, 그들은<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당원들이었습니다.<신한청년당>은 1918년 1월 미국 윌슨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선언 이후 전개된 식민지 해방의 세계 흐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자 중국 상하이에서 만든 당 입니다 이 당의 대표이자, 청년들의 리더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이를 뒷받침할 거족적인 궐기를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몽양 여운형입니다.
일제를 제압한 정의의 웅변가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핵심인물인 몽양을 같은 해 11월 도쿄로 불러들입니다. 회유를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당시 34세의 몽양은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일본의 고관대작들을 오히려 주눅들게 했습니다.
식민지 정책을 책임졌던 고가(古賀)척식국장관은 몽양과의 회담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대와 같이 앴을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선총독부에 불을 질렀을것이다.나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대에게 높은 경의를 품고 있다."
일본군의 총수로서 몽양을 위압하려했던 다나카 육군대상은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기획하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의 시세를 볼 때 당연하지않은가?" 라며 오히려 몽양의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동경제대 요시노(吉野)교수는 "여씨의 말에는 확실히 한가지 범하지 못할 정의의 섬광이 있다.(중략) 중국, 조선, 대만 등 많은 사람들과 회담했으나 교양 있는 존경할 만한 인격으로서 여운형 씨는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단언한다"라며 몽양을 격찬했습니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도쿄제국호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몽양 여운형의 웅변을 듣고 감동한 일본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웅변에 감명받은 일본의 좌익 지도자들은 몽양을 환영하는 만찬을 열었으며, 이들은 몽양의 연설을 듣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조선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빛나는 성과로 평가받는 몽양의 일본 방문 독립선전활동! 조선의 독립을 일제의 수도에서 당당하게 외친 몽양의 사자후는 일본인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고, 몽양을 회유하려다가 자신들의 수도를 조선 독립의 선전장으로 만들어준 꼴이 된 일본 정계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제국의 콧대를 꺽어버린 조선의 청년.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습니다.
한 세대를 껴안은 조선의 거인
한 세대를 껴안은 조선의 거인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몽양은 폭넓은 행보를 하고, 그의 특출한 능력은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혁명가들과 교류를 가능케 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을 도모할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손문과 만났으며, 미국 윌슨대통령의 특사를 만났고 대한민국임시 정부를 세운뒤에는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소련의 지도자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났습니다. 모두 조선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로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몽양의 활동이 자기편에만 국한되었던것은 아닙니다. 몽양은 일제의 고위인사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몽양은 그들을 다시만나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역설했고, 몽양을 만났던 일본 인사들은 몽양의 범접하기 어려운 정의감과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그리고 사람들을 품는 포용력에 감복하여, 비록 식민지의 인물이고, 적국의 지도자였으나 교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민족지도자
조선 건국을 준비했던 선견지명의 전략가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보호관찰대상 1호였던 몽양 여운형. 그런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몽양은 1942년 이미 해방 뒤 식량사정과 치안문제를 염려해 이에대한 조사와 준비를 청년들에게 지시했으며 1944년 비밀리에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4만명이 넘는 맹원들을 확보했으며, 해외 독립운동 조직들과도 연계해 공동투쟁을 도모했습니다.
몽양은 곧 일본이 패망할 것을 확신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몽양 여운형이라면 믿을 수 있었기에 이런 지하 조직이 가능했습니다.
항복 직전 일제의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치안을 몽양 여운형에게 맡깁니다. 실질적으로 조선인민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있는 인물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보름도 안돼 전국적으로 145개가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인민위원회들은 건국준비위원장 여운형에 대한 인민의 신뢰와 해방 전 몽양의 사전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통일 조선의 첫 번째 국가원수가 되었을 진정한 민주주의자
몽양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노력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찢어진 민족을 합치려고 노력할때, 우익은 몽양을 '빨갱이'라하고, 좌익은 '철저한 친미주의자'라고 하고, 또 어떤이들은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몽양은 어떤사람이었을까요?
1945년 10월 5일 국내에 있던 각 정당 수뇌부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인 인민공화국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이냐의 문제로 국내정치세력간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점입니다. 당시 간담회에는 여운형을 비롯해 허헌, 최용달, 최근우(인민공화국), 송진우, 김병로, 백관수, 장덕수(한국민주당) , 조동호, 이현상, 김형선(조선공산당), 안재홍(국민당) 등이 참석해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모여 건국을 위한 단결을 논하는 간담회였습니다. 이 간담회에서 몽양은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대회를 소집하야 임시정부를 지지하느냐 인민공화국이냐 또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것이냐를 국민의 총의에 물을 것입니다. 즉 최후의 재판은 반드시 국민이 내려야 할 것입니다. 무슨 주장명령보다 지금의 조선에는 복종이라는 것이 즉 결의에 따라 간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결의라도 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여기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아직 이승만도 김구도 귀국하기 전이었고, 인민공화국의 몽양 여운형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을 때입니다.그렇지만 몽양은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런 몽양의살신성인(殺身成仁)의 노력으로 인해 '각정당 행동통일위원회'가 구성되고 통일적인 건국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그의 유아독존(唯我獨尊)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통일위원회는 깨져버리고, 이후 찬탁, 반찬탁 논쟁으로 좌우익 갈등은 첨예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몽양은 좌우합작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몽양이 피살되던 해인 1947년, 냉전으로 치닫는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통일국가 수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근로인민당을 세울 때도 몽양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즉 선통일 후 국민투표를 통해 인민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멀었던 극좌, 극우세력들은 그런 식의 통일보다는 분단정부 수립 후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이념을 관철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극단적 대결 속에서 좌우를 아우르려했던 몽양은 숱한 테러에 시달렸으며 결국 테러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예견했던 몽양 여운형은 1947년 7월19일 그의 말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친일.분단세력의 하수인이 쏜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몽양은 좌우합작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몽양이 피살되던 해인 1947년, 냉전으로 치닫는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통일국가 수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근로인민당을 세울 때도 몽양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945년 11월 12일 우익성향의 한 단체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해방 후 첫 여론조사에서 최고득표를 받았던 몽양 여운형. 1946년 초 미국과 소련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하면서, 양국은 각각 그 통일정부의 수반으로 몽양 여운형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을 아울러 조선을 하나로 묶을 포용력있고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몽양 연보
우리의 자율통일이 없는곳에 조선제(朝鮮製)
정부도 없을 것을 잊지 말자
몽양 여운형(1886.05.25 ~ 1947.07.19)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피격으로 서거하기까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교육자, 신앙인으로 민족계몽운동가로 활동하다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한청년당을 결성,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함으로써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씨를 지폈으며,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는 등 항일 독립운동가, 외교정치가로 활동, 국권회복에 힘썼다. 해방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목숨을 담보로한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직후"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주독립국가의 건국과 민족분단을 막기위해 중도 정치노선으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다 흉한의 총탄에 쓰러진 시대를 앞선 선각자요, 민족의 지도자로 알려져있다. 2005년 3월 1일에 비로소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에 추서되셨고(국가보훈처), 다시 2008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에 추서되셨다(행정자치부).
188604
4월 22일(음력)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 출생
190003
배재학당 입학.
190103
흥화학당으로 전학.
1903-
흥화학당 중퇴,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 입학.
1907-
사립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설립.
1908-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 해방시킴. 기독교 입교. 장로교 C. H. 클라 크(곽안련) 목사의 조수(전도사)가 됨.
1910-
강릉 초당의숙에 교사로 초빙되다.
1911-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 입학.
1912-
황성YMCA야구단장으로 일본 원정경기. 우리나라 최초 해외 원정경기.
1913-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품다.
1914-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이후 항일비밀단체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1916-
상해 거주 동포 자녀들 교육을 위해 ‘상해 기독교 소학교’ 설립. 이듬해인 1917년 정식초등학교인 인성(仁成)학교로 개교
191811
상해 고려 교민 친목회(이후 상해 교민단) 설립 초대총무 이후 회장 역임.
11월,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자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
191901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 이와 함께 조소앙, 김철, 장덕수, 이광수 등 신한청년당원들을 국내와 일본에 파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전달. 이 시기, 여운형 자신은 간도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림.
02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
03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에 고무된 국내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킴. (이 불씨는 결과적으로 몽양이 지핀 것임)
04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근거지는 만주였으나, 몽양이 파리 강화회 의에 대표를 파견한 이후 각지의 지도자들은 몽양이 있는 상해로 집결함. 여기서 이곳 터줏대감이던 몽양이 사실상 이들 망명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하며, 뒤이어 이들에 의해 상해임정이 탄생하게 됨. 그러나 당시 몽양은 아직 30대 초반의 청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명망가들이 큰 감투를 차지하고, 몽양은 외무부 차장에 취임하게 됨. 같은 해,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포자제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함.
11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 등과 함께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
일본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회담하여 조선 자치제 안을 공박하고 즉시독립을 주창. 특히 <제국 호텔>의 사자후 연설은 유명함.
12
상해로 귀환, [독립신문] 등에 일본 활동상이 대서특필되면서 광범한 여론을 불러일으킴.
192201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 개회식에서 연설함.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논의함.
03
상해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의를 추진.
10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 조직.
1923-
상해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사로 취직.
1925-
북경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국공합작에 일조. 이 무렵 모택동과도 만남. 한편 손문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
1926-
국민당군의 무한·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
1928-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 체육담당으로 축구부와 함께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
마닐라에서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
192907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1932-
출감.
07
조선총독부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함.
1933-
[조선중앙일보] 사장.
1934-
조선체육회 회장.
1935-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재건 추진. 조동하,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음.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김신 형제의 상해 탈출을 도와줌.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8월13일자에 보도(동아일보는 8월25일 보도)하며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자진폐간.
1939-
이상백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연계 시도.
1940-
동경왕래(1942까지 5차례). 일본 수뇌부는 중국 모택동과 장개석 양쪽과 가까운 여운형의 특이한 존재를 이용하여 중일화평공작을 시도해보려고 했음. 여연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무렵 몽양은 일본 천황까지 만났다고 함. 그만큼 일제는 중국에 투입된 병력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돌리고 싶었던 것이나 몽양이 이를 거절. 하지만 이들과 회담 하면서 몽양은 일제가 패망할 것을 확신하게 됨.
1942-
이정구에게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그리고 장권에게는 치안대 조직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지시함.
02
주변에'일본이 패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됨. 서대문형무소에서 건국에 대비한 결사체를 구상함.
1943-
가출옥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여기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 돌입.
1944-
봉안에서 만군(滿軍)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 해방시 일본군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었음. 이와 함께 염윤구, 이 혁기 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 시킴.
08
경성 경운정의 삼광한의원에서 [건국동맹]을 결성.
10
용문산에서 농민동맹 결성.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짐.
194503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공 급에 대한 약속을 받음.
04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
05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
08
8월초, 건국동맹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 됨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 위원으로 선출.
08. 15 엔도오 류우사쿠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위임 받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동 위원장에 취임.
08. 16 건국치안대를 조직.
08. 17 건준 1차 조직 완료.
08. 22 건준 2차 조직 확대개편.
09
09. 04 건준 3차 조직 개편.
09. 06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됨. 인공 부주석.
10
10. 05 청년들이 주도한 좌우합작 수뇌회담에 참석.
10. 15 군정장관 아놀드와 하지 중장 만남.
10. 17 귀국한 이승만을 방문.
10. 23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
12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
194602
이승만의 참모인 굿펠로우로부터 미군정 지문위원에 참여해줄 것 을 권유받고 승락했으나, 이 자문위원회가 결국 이승만과 친일파 일색 의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자 즉시 탈퇴함.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임명과 동시에 탈퇴.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05
미 국무성의 지령으로 미군정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에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참여.
07
좌우합작위원회 회담 참석.
08
하지 사령관, 합작격려친서를 보냄. 인민당 당수직 사임.
10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 입법기구 문제 의견교환.
11
또 다른 ??민주의원??이 된 입법기구에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자회견.
12
3당합당의 과정에서 극좌파에 시달린 몽양은 정계은퇴 의사를 신문에 발표.
194704
제2차 미소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몽양은 신당을 새로 결성하기로 함.
05
근로인민당 위원장.
06
미소공위 협의규정에 따라 개최된 서울 합동회의에 참가, 통일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
07
서재필 박사 귀국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인천항에 출영 나감.
07.19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됨.(향년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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