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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정리 출처: 청와대국민청원

천아1234 2021. 9. 10. 09:09

조선민족은 본래 수천년 전 '조선'이란 고대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한韓 이 모두 단군의 교화를 받았다고 전설에 전한다.
요동과 요서 역시 조선 자손들의 땅이었다고 삼국지 동이전은 적는다.
평화롭게 사는 군자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고대 왕조 조선 은 기원전 4세기 말 사악한 연나라의 침략으로 청천강 이북을 모조리 잃었다.
청천강 이북은 요동군의 땅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 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서군 요동군에 걸쳐 만리에 걸친 국경선의
돌성,토성,목책,망루,요새들 설치하게하여
청천강에까지 국경방비 초소들을 설치시킨다.
압록강 초소와 청천강 초소 사이는
조선과 중국의 사신이 오가는
빈 공터가 되었다.
조선 왕은 두려워 진나라의 신하가 되겠다했으나 조회에 참석하진않고
엄히 방비하였다.
진나라 역시 연나라 땅을 먹었을 뿐이므로 굳이 조선 땅에 욕심내지않고
조공하러오라 강요하지도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195년 농민반란군의 나라 한나라가 진나라를 멸하고 서자
연나라 구역을 맡던 농민군 총독 노관이
수령 유방의 숙청을 피해 흉노로 도망친다.
노관의 부하 위만은 요동군의 동쪽 요새 서안평현(봉황성~단둥시)을 통해 나와서
압록강 초소와 청천강 초소의 빈 공터에서 중국 난민들을 모은 후
중국 난민들이 모여있다는 평양의 낙랑(정백동 구역)이란 곳으로 청천강을 건너 간다.
그후 중국 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선 왕을 마한 지역으로 추방시키고
자기들끼리 낙랑 타운을 세운 후 왕으로 위만을 추대하고 수도를 왕검성으로 정한다.
농민군 수령 유방이 임명한 요동태수에게 무기와 재물을 받아
주변 진번 임둔 예맥을 복속시킨다.
중국 난민들의 폭력질에 질린 예맥 군장 남려가 강원도에서 중국 식민지 창해군의 설치를 환영하자
예맥족 도적들이 그건 안된다며 창해군을 설치하러오는 중국 관리들을 살해한다.
중국 난민 정권의 리더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흉노의 왼팔이 되어 한제국에 대항하다가
1년만에 망하고
기원전 108년 한제국은 낙랑 타운은 물론 북한 땅과 만주 전역을 정복하고
현토 낙랑 진번 임둔 으로 다스린다.

기원전 82년~기원전 75년 사이 중국 황제가 식민지 컨트롤을 발가락으로 하는 바람에
부여 가 반역해 일어나고
옥저 동예가 반역해 일어났다.
현토군은 옥저에서 도망가 고구려현으로 옮긴다.(고구려 부족은 현토군의 일개 현의 통치를 받고있었다.)
낙랑군은 진번군 임둔군을 통합하고 강압으로 옥저 동예와 한韓족을 밟고 7개의 현을 두어
통치했다.
옥저 동예 조선의 피난민들과 중국계 난민들이 물밀듯이 경주로 와서
기원전 57년 진한 12국을 세운다.

기원전 37년 부여의 왕자 주몽.. 본명은 연비 라고 하는 자가 졸본부여 고구려현으로 와서 사악한 중국의 식민지 현토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오녀산성에서 시작한다.
소노부(비류부) 군장 송양은 고구려 5부족을 모두 다스리는 고구려연맹의 리더로서
현토군 고구려현 현토태수에게 공물을 바치며 아부하며 살아왔지만 주몽의 리더쉽을 보고 감복해 주몽의 독립운동을 후원한다.
당시 한나라는 식민지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토착 추장을 현령으로 임명시켜
토착인을 다스리도록했다. 대신 공물은 제때 제때 바치도록 했다.
주몽은 이때 고구려현의 현령이 되어서 사무관리를 맡았던거같다.

기원전 18년 현토군의 압제를 벗어나 도망치던 고구려계 종족 구다국 왕자 온조가
한강 유역에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백제를 세우고 이웃 마한 부족국 1개를 쳐서
먹는다.
서기 12년 고구려 추모(주몽) 왕(사실은 추장 수준)이 현토군의 고구려현에 대항해서 독립운동하다가
중국군에게 체포되어 목이 잘려 수도 장안으로 보내진다.
그 아들인 고구려의 왕 여달 이 복수로 고구려현을 다 불태워버린다.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인 여율이 무휼(막래) 이라 불렸다.
막래 왕은 동옥저 북옥저 동예 라는 동쪽의 부여족을 모두 복속시키고
부여 동부 지역 사출도 대인 '대소'의 군사를 엄리대수 늪지에서 크게 참패시킨다.

당시 중국은 주몽의 목을 벤 중국 황제 왕망이 반란으로 목이 달아나고
농민군들이 천자가 되겠다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혼돈의 시대였다.
제일 최고로 센 농민군 리더인 유수는 자칭 한漢의 천자라 하며
요동태수로 하여금 고구려를 견제토록하게하고
평양의 중국인 왕굉으로 하여금 낙랑조선을 부활시키려고 반란을 일으켜
몇년간 독립을 이뤄낸 조선인 독립군 지도자 왕조를 찔러 죽이게해서
그 목을 요동태수에게 보내게하니
낙랑군이 다시 회복되었다.
조선인들은 낙랑군을 떠나 진한으로 탈북자가 되어 오지만
진한연맹의 리더인 염사치가 군사력으로 남조선을 위협하는 낙랑군이 무서워서
조선인들을 전부 낙랑군으로 보낸다.

농민군 리더 유수는 중국을 모두 먹어가며 참람되게 황제라 칭하며 낙랑군의 동부 7현에서
독립한 조선족 나라들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 동예 를 낙랑의 제후국이라 책봉하고
철마다 조공바치게하니 조선족들이 그리 하였다.
고구려 역시 유수에게 사신을 보내
그러자 고구려 무휼이 대노해서 친중사대주의자 함흥의 최리낙랑옥저 를
토벌했다.

마한 진한 변한 78개국 과
부여 동옥저 북옥저 남옥저 동예 가 현토군 낙랑군에게 빌빌거릴 때
부여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살며 중국 편 들며 고구려를 괴롭힐 때

고구려는 약탈과 삥뜯기협상 전술로 선비족 오환족 일부 마한족과 연계해
중국 식민지 현토군 낙랑군에 대항하여 400년간 투쟁한다.

한국인의 조상들을 지배하던 추장들은 천자에게 토산물을 바친 후
천자에게 관모 관복 도장 옥 악기를 하사받아 천자께 충성을 하고
천자가 하사한 보물들을 부족에게 보이며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인증했다.
한국의 조상들은 철마다 현토군 관청 낙랑군 관청에 나아와 태수를 뵙고
인사를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오로지 고구려만이 산성 오두막궁궐에 틀어박혀 음식을 아껴먹으며
군사를 양성해 현토군과 거래를 하려하고 현토군을 약탈하였다.

중국의 행정구역 요동 현토 낙랑 대방은 400년간 만주,한반도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제어했다.
90개의 나라로 갈갈이 흩어져있는 한국의 조상 토인들은
인구가 적어서 중국에 맞설 힘이 못되었고
고작해봤자 군현 관청을 도적질하고 불태우는 수준에 불과했다.

중국 삼국지 시대에 한국의 조상들은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다
위나라 천자가 보낸 낙랑태수 유무 , 대방태수 궁준,유주자사 관구검,현토태수 왕기 의 토벌군이 와서 고구려 ,
한국을 멸망시키고
한국(마한)인들 등가죽을 뚫고
밧줄을 꿰어서 풍납토성을 짓도록 강제노역을 시켰고
베이징의 사령관(유주자사) 관구검이 현토태수 왕기와 함께 고구려를 토벌해서 고구려의 궁궐과 도시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고구려 왕을 연해주까지 추격했고 중국의 부하인 부여 왕이 중국군의 고구려 토벌을 위해 쌀배달을 했던
역사는 분명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부여 편 옥저편 동예편 한韓 편에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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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에 소속된 삼한 54개국(마한 진한 변한)
"삼한은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태수님께) 조알朝謁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삼한편

한제국은 고구려를 현토군의 고구려현으로 만들어 북 , 관악기 , 악공을 하사했다.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토玄菟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鼓)과 관악기管樂器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후한서 동이전 고구려편

이상의 내용은 내가 지어낸 내용이 아니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o
에 있는 고대 중국 기록들을 알기쉽게 정리한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