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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전태일

천아1234 2021. 8. 16. 19:52

삶과 죽음

드르륵 득득,
긴 공장의 밤,
어린 시다들의 여린 손끝이
애처로웠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핫바리 인생'의
절박함이 뼛속에 배여 있기에
열 두어 살 시다들의 고통에 대한
아픔이 더했습니다.

물질이 중요시되는 사회,
가진 자의 폭력과 기만에 몸서리치며,
그것들에게서 여린 마음들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청년은 말합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리고
'꼭 돌아오겠다'고…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오래
잊고 지내진 않았는지요,

그리고 청년의 외침과 바램은
그 세월만큼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봅니다.

들어가는 말

불꽃이 되어

꽃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키울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진실된 사랑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칠수 있습니다. 전태일의 삶은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었고, 죽음으로써 참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습니다.

전태일, 그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달픔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습니다.

전태일, 그는 한없이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나이에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구두닦이를 비롯해 신문팔이, 삼발이장사, 껌팔이, 우산장사, 뒤밀이 등등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되기까지 숱한 밑바닥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쩌면 단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실히 일했건만 일당은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50원!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며, 잘못된 사회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전태일, 그는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을 다 바쳐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어린 전태일

대구에서 서울로

태일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폐허가 된 것은 도시와 대지 뿐만이 아니었지요. 사람들의 마음도 갈갈이 찢기었고 삶의 터전도 잃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피폐함 속에서 삶을 시작한 태일은 가난과 고통을 숙명처럼 안고 있었습니다.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난 태일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이미 유아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겪었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 부모의 등에 업혀 사람들 속에서 부대껴야 했습니다. 곤궁하고 피폐한 삶이 어디 태일의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겠습니까 만은, 냉혹한 현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태일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영원히 아물지 않는 저주처럼 달라붙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던 태일의 아버지는 염색을 맡긴 원단이 잘못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몸뚱아리밖에 없는 빈민이 몸뚱이를 움직여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는 그나마 엉덩이라도 부빌 수 있는 곳이 서울이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기술도 있어서 어떻게든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난한 가족은 불안 속에서도 희미한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여섯 살짜리 어린 태일과 그보다 어린 동생 태삼, 순옥이를 업고 안고 하면서 낯선 땅, 서울역 앞에 내린 것입니다. 이때가 1954년, 전쟁이 휴전상태로 바뀌고 이 나라가 폐허로 변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막막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먹고 살 걱정

전쟁은 겨우 끝났지만, 먹고 살 걱정은 더욱 절박했습니다. 태일의 가족처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고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때라 태일의 아버지는 실업자로 하루 하루를 떠돌았습니다.

재봉 기술이 있었지만 취직하기가 어려웠고 평화시장이나 중부시장 등에서 그때그때 생기는 일거리를 해주고 몇 푼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태일의 가족들은 서울역 앞 염천교 다리 밑에서 한댓잠을 자며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그들 가족은 거지였고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한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내일의 희망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참담했고 허우적거릴수록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루 세끼 밥은 커녕 죽도 먹을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죄 많은 인생을, 한 많은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일의 가족과 같은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던 시대라 한 가족의 불행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불행은 추상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비바람을 맞으며 한댓잠을 자고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는 분명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소년 전태일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소년 태일

역사의 격동이 한 가정을 어떻게 흔들어 놓는 지 우리는 태일의 가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란했던 가정을, 가난하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리는 역사의 물결은 거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고통과 절망의 물결이기도 했습니다.

1960년 초에 태일은 남대문 국민학교에 편입하여 4학년이 되었습니다. 12살이 된 태일은 소년으로 성장했고, 집안의 어려움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던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겨우 몇 개월여의 행복을 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4.19 혁명 직전에 학생복을 단체로 주문받은 태일의 아버지는 여기 저기서 빚을 얻어 원단을 구입하고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

자 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중간에서 대금을 가지고 사라져버려 태일의 아버지는 빚더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전 재산-판잣집, 재봉틀, 가게 보증금 등으로 빚을 청산하고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장사하면서 알게된 원단 가게 주인과 친구들이 셋방을 얻어주어 노숙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낙담한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난폭해지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될 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한 순간에 평온했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어린 네 명의 자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은 술에 취해 세상을 원망하며 가족을 괴롭히고 어머니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활이 곤란한 상태여서 당장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먹는 때보다 굶는 때가 많은 나날을 보내던 태일은 신문팔이를 시작합니다. 12살 소년 태일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신문도 팔고 구두도 닦으면서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신문을 팔기 시작했으나 차츰 신문을 팔아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태일이를 학교에 다닐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4학년 초에 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행상...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집안 형편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12살짜리 어린 태일은 10살짜리 동생 태삼을 데리고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삼발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삼발이, 솔, 조리, 방빗자루, 적쇠 등을 위탁판매소에서 받아다 물건을 팔고 원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밑천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였습니다.

어린 형제는 "솔 사려! 조리, 방비, 적쇠요! 쓰레받기나 삼발이요!" ...... 긴긴 여름날을 이렇게 외치며 아침부터 씨레이션 박스에 솔, 조리 등을 담고 시내 여러 골목과 시장들을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까지 헤매었습니다. '그 길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자 병중에서 완쾌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친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주린 배를 참으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힘겨운 나날은 어린 형제를 지치게 했고 부족한 수입으로 인해 원금에서 가족들이 먹을 국수를 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물건값을 입금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어린 태일의 가슴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찌들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을 행상으로 떠돌면서 발이 부르트고 목이 쉬도록 일했지만 태일에게 돌아온 것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집안 형편과 원금을 입금하지 못해 늘어난 빚이었습니다.

청년 전태일

'시다'에서 '미싱사'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토대구축에 여념이 없던 60년대 말,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에서 청년기의 삶을 시작한 전태일은 청계천 어린 노동자들의 팍팍하고 고달픈 삶을 통해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착취 구조를 자각하게 됩니다.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던 태일이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미싱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일당이 50원에 불과한, 말할 수 없이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다방에서 차 한잔 값이 50원이었으니 하루 14시간을 힘겹게 일한 대가가 일반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태일이 이렇게 싼 임금을 감수하며 '시다'로 취직을 한 것은, 당장의 생계보다는 기술을 배워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동안 떠돌이에 행상으로 전전하던 생활을 마치고 저임금이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택함으로써 태일의 삶이 또 한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태일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태일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3천원으로 대폭 올랐습니다. 하숙집과 공장을 오가며 오로지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 볼 수 없었던 것이 이때의 태일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서 살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이제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이고, 어머니도 행상을 해서 돈을 벌고 태일도 매달 적은 돈이지만 월급을 받아오게 되어 가난한 가정에도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1966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시장.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지 1년여 동안 태일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처음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은 바로 태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경제학 이론, 정치경제학, 칼 막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잉여가치론 등 고도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날카로운 이론은 아니지만 그의 가슴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 남을 '또 다른 나'로 생각하는 바로 그 순수하고 애틋한 연민과 사랑이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은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 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것을 태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바로 자기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수많은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열 두세살의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방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 어린 여공들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늘에서 그늘로 전전했던 태일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태일은 자신이 놓인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평화시장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자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사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불꽃으로 다시 살다

태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써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노동운동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비롯해 민주노동운동의 발달에 있어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민중의 삶과 투쟁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피끓는 고통의 결과였지만 그 고통을 넘어 모든 노동자와 민중은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으로 되살아난 불꽃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에 노동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 속에서는 전평으로 대표되는 좌익 노동운동이 대세를 이루다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산업화가 본격 시작된 1960년대부터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단지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면서 군부독재의 지독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평화시장의 상황은 결코 이곳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국 노동자가 처한 보편적인 노동조건이며 생존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포정치로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가열차게 불타올라 70대년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특히 78년 원풍모방과 동일방직, 79년 YH 무역 노조의 투쟁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군부쿠데타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가혹한 탄압 속에서 잠시 활동이 멎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83년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 대학과 연계한 현장 투쟁 등 다양한 방법과 발전된 운동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도약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적인 내용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을 겨냥한 반제국주의, 반독재, 반자본의 성격을 확실하게 띄었으며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후 불붙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 산업의 모든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에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있습니다.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노동운동이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를 이어 산화한 수 많은 노동 열사와 민주 열사의 명목을 빌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때까지 노동자의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