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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암살사건(2)

천아1234 2021. 8. 29. 08:20

27년 후 불쑥 나타난 네 남자… “우리가 공범이오 배후는 절대 없소”

■ 배후도 공범도 없다? 판결도 ‘무기’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의 조재천 검찰관(4·19 후 민주당 정부의 법무부 장관 역임)은 자기와 함께 기거해온 한지근을 범인이라고 경찰에 신고한 신동운을 추가로 검거, 조사했다. 그러나 공범으로 볼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풀어주고, 한지근만 살인 및 포고령 제5호 위반(무기 불법소지)으로 구속 기소했다(1947년 9월6일).

조 검찰관의 공판청구서(공소장)에 기재된 한 피고인의 신상과 범행경위는 이러했다. 1929년 3월 평양 출생인 그는 영변에 있는 용문중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짓다가 중학 동기생 김인천이 이끄는 ‘건국단’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민족 분열을 초래하는 자를 숙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그들은 남조선의 여운형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 민족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며 그를 처단하기로 모의했다. 피고인은 같은 단원인 백남석으로부터 한민당 당수 송진우 살해범인 한현우의 처에게 건넬 소개장과 함께 김인천이 주는 권총 1정을 숨겨가지고 평양을 출발(1947년 6월26일),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그리고 여운형의 동태를 면밀히 탐지 확인한 뒤 범행일시에 혜화동 우편국 옆길에서 여운형이 탄 차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차 뒤쪽에서 여씨의 등을 향해 권총 3발을 쏘아 그를 살해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한지근은 진범이 아니라거나 경찰이 사건을 축소 엄폐하고 있다는 등의 의혹이 나돌았다. 배후세력에 대한 논란도 무성했다.

첫 공판은 그 해 9월27일 오전 서울지방심리원 대법정에서 재판장 박원삼 심판관(6·25 때 납북)이 주재하는 합의부의 심리로 열렸다. 당시의 신문 기사와 공판조서를 보면, 법정에서 한지근은 주저치 않고 자기가 여씨를 살해한 동기와 경위를 당당하게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판은 피고인 신문 2회, 몽양의 운전기사 등 3인의 증인신문 1회, 이렇게 단 3회로 끝났는데 놀랍게도 공범이나 배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질문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 검찰관은 한지근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나 재판부가 내린 형은 무기징역이었다. 한지근은 한때 불복했다가 곧 취하함으로써 무기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개성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는데 6·25가 일어난 후 생사불명이 되었다.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는 소문과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등의 추측이 나돌았다.

일러스트 | 박건웅

■ 27년 만에 나타난 4명의 공범

그러나 ‘한지근 단독범’ 판결은 조작된 각본에 속아넘어간 어이없는 오판이었다. 범행 후 27년이 지난 어느 날, 몽양 암살의 공범을 자처하는 네 사람의 남자가 등장하는 깜짝쇼가 벌어져 세인을 놀라게 했다.

1974년 2월4일, 이 사건의 공범이라며 나타난 일당은 김흥성(54), 김훈(49) 김영성(49), 유순필(49) 등 네 명의 중년 남자였다. 범행의 총지휘자는 김흥성이었고 한지근은 제1저격수, 김훈은 제2저격수, 나머지 두 사람은 저격 후의 현장 확인, 수사상황 파악 및 도피로 등을 맡는 확인조 등으로 각자 범행을 분담했노라고도 했다. 한지근은 본명이 이필형으로 범행 당시 나이도 19세가 아닌 21세였다는 말도 나왔다. 이들은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암살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으며, 범행 직후 한지근의 체포과정 및 진술은 사전 각본에 따른 연출이었다고 했다. 김훈은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폭로를 결심했다”고, 유순필은 “역사가 너무 왜곡된 것 같다. 뒤늦게나마 진상을 밝히는 것이 몽양 선생이나 한지근 동지에 대한 한 가닥 예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자기들의 배후는 없다고 했다.

이들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이미 살인죄의 공소시효(범행 후 15년)가 12년이나 지난 뒤라서 형사처벌은 불가능했다. 다만 국민들은 이참에 사건의 정치적 배후가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을 조사한 서울지검은 아무런 배후관계도 밝혀내지 못한 채 불기소처분을 하는 데 그쳤다. 그 네 사람의 출현은 공소시효 제도를 악용해 역사와 국민을 우롱한 단막극이 되고 말았다.

서울지검에 출두하여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왼쪽부터).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배후 조사는 언터처블?

앞서 언급했듯이 몽양 피격 직후부터 그 배후세력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으며 한지근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풍문도 자자했다. 그러나 27년 만에 나타난 김흥성 등은 ‘배후는 없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사건 수사 초기부터 석연치 않은 의문점이 속출했다. 당시 수도경찰청의 수사과 간부이던 김재곤 경감은 “한을 검거하고 공범 수사를 하던 중 상부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혀 미온적인 채로 수사를 끝냈다”면서 수사과장 노덕술(일제 때 악명 높았던 고등계 형사로 반민특위에 검거된 바도 있다)로부터 “공범을 깊이 팔 것은 없지 않느냐”고 제지를 당했다고 했다. 장택상 수도청장은 김 경감의 보고를 받고 “수사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 사건은 관할 동대문경찰서로 넘어갔다. 조재천 검찰관의 입회 서기였던 최만행(훗날 제주지방법원장)도 “범행 20일 전에 월남한 한이 범행에 필요한 정보를 그토록 정확히 입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그밖에도 여러 의문이 남는다”고 회고했다(한국일보 1974년 2월5일자). 이 기사에는 ‘한지근의 변호인이던 김섭 변호사도 최씨와 같은 의견이었다’고 되어 있으나 사석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김 변호사의 <여운형살해사건 진상기>(1948)에는 공범이나 배후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밖에도 의문은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었다. 사건의 배후로 좌익이나 우익 세력을 지목하거나 아예 실명으로 박헌영이나 김구를, 나중에는 이승만을 거론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검찰관이 작성한, 한지근에 대한 5회에 걸친 피의자신문조서와 신동운에 대한 3회에 걸친 증인진술조서의 어디에도 범행의 배후에 대한 면피용 질문의 시늉조차도 나와 있지 않다. 검사가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배후’란 말조차 꺼낸 적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좀 더 차원 높은(?) 풀이도 있었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존립 목적이 당초의 임시정부 수립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바뀌어가는 신호탄이 바로 몽양의 암살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몽양의 좌우합작 노력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등 단독정부를 계획하는 세력에게는 마땅치 않은 장애물로 변했다는 분석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발생한 몽양 암살사건을 둘러싼 여러 의혹은 한갓 막연한 풍설일 수만은 없었다.

당시 남한에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며 갈등 내지 대립관계에 놓인 몇 갈래의 정치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은 앞서 본 대로 처음엔 좌우 대립으로 시작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첨예한 적대관계로 맞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남북협상 등의 문제로 충돌하는 와중에 인명 살상까지 노리는 광기어린 테러가 속출하고 말았으니 그 첫번째가 우파의 대표 격인 송진우 암살사건(1945년 12월30일)이었다. 이번에 다루는 여운형 암살사건 뒤에도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사건(1947년 12월2일), 임정 주석 백범 김구 암살사건(1949년 6월26일), 서울시경 사찰과 김호익 총경 피살사건(1949년 8월12일)이 일어났다. 또 남한의 독재정권(제1공화국) 아래서는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1952년 6월25일), 육군특무부대장 김창용 암살사건(1956년 1월30일),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1956년 9월28일)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 여운형의 건준 및 좌우합작노선에 대한 평가

8·15 해방 후 몽양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논자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일부에서는 그가 임정 환국 전에 건준과 인공을 졸속으로 급조한 점, 반탁에서 찬탁으로 표변한 점 등을 지탄하고 그의 중간노선을 기회주의로 폄하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신속하고 자주적인 시국 대처,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의견이 있는데 후자가 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건준을 만들고 인공을 선포해 미군정의 직접 통치를 면해보려고 한 점,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한 점은 비록 결실 없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외로운 집념과 우국충정의 결행은 당대나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부 논자는 그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고자 한 데는 우선 남북 전체를 통치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조국의 분단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신탁통치 문제는 그 뒤에 해결에 나선다는 지론이 담겨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고난도 행보는 당시 좌우 양측으로부터 거센 집중포화를 받았고 마침내 흉탄에 쓰러지는 비통한 최후를 맞게 되었으니, 그후의 분단 고착으로 인한 민족의 비극을 반추해 볼 때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몽양의 유택은 서울 수유리에 있다. 2002년 8월14일, 8·15 민족통일대회 북측 대표의 일원으로 몽양의 차녀인 연구씨가 서울에 왔을 때 아버지 성묘조차 막으려 한 남측의 견제로 모처럼의 환영행사가 1시간 반이나 늦어졌던 일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