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음모론 완전정리: '음모론의 시대(전상진, 2014)'
* <황해문화> 2015년 봄호에 실린 글.
서평 <음모론의 시대>(전상진, 2014)
음모론 완전정리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완전정리. 그렇게밖엔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에는 담론체계이자 사회현상으로서 음모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 음모론이라는 현상에 대해 이 정도로 진지하고 철저하게 파고든 저술을 본 기억이 없다. 쉽다고 할 수만은 없는 내용임에도 개념의 명징한 사용과 정갈한 문장 덕에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가끔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위트와 너스레도 맛을 더한다.
음모론이라는 말에는 이미 상당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상, 루머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에이 그건 음모론일 뿐이지”라고 낙인찍는 순간, 어떤 사람의 꽤 신빙성 있을지도 모를 가설이 순식간에 ‘찌라시 급’으로 전락하고 만다. 음모론과 합리적 의심을 구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에, 음모론이라는 명명 자체가 소모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음모론을 진지하게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그동안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자 전상진은 왜 음모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는 음모론에 ‘꽂힌’ 순간을 명확히 기억한다고 말한다. 2008년 5월이었다. “당시 나는 음모론의 오묘한 쓸모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음모론은 저항(‘촛불’)의 불쏘시개였지만, 또한 저항을 분쇄하는 조치를 정당화했다.”(8쪽)
저자는 음모론이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숙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후 그는 음모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2010년 <한국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paranoid style)?>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재직하는 학교(서강대학교) 사회심리학 수업에서 음모론을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몇 해 동안의 연구와 고민은 2014년 12월에 결산된다. 바로 이 책, <음모론의 시대>다.
음모론은 과잉 합리성이다
저자가 2008년 촛불시위에서 “음모론의 오묘한 쓸모”를 포착한 반면, 나의 경우 음모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때는 2006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황우석 사태라 불리는 일련의 소동을 한 명의 기자로 경험하면서부터였다. 황우석 사태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 한국사회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전무후무한 스캔들이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흉터를 남겼다는 점에서 가히 ‘외상적 사건(traumatic event)’이었다. 2015년 현재, 황우석 씨가 주도하는 연구소가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의 수주를 따내는 등 버젓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인 사건이기도 하다.
몇몇 사람들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에 실제로 심상찮은 문제가 있음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황우석에 열광하던 이들이 격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기는 다름 아닌 음모론이었다.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기자는 “(서구 과학계가) 겉으로는 생명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면서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고 일갈했다(홍혜걸,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중앙일보> 2005년 11월 24일자). 이후 등장한 음모론들에 비하면 홍 씨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딴지일보> 김어준 씨는 “어떤 세력이 기획한 시나리오”에 의해 “절도범” 황우석이 “살인범”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바꿔치기 당한 것’이라는 시나리오였다(김어준, ‘새튼의 특허에는 음모가 있다’, <딴지일보> 2006년 2월 28일). 유대인 음모론(“MBC가 유대인인 새튼과 손잡고 ‘황우석 죽이기’에 나섰다”)도 갖가지 버전으로 등장했다. 가히 음모론의 홍수였다.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그토록 허술한 음모적 서사에 탐닉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황우석의 거짓말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 합리적인 모습을 보였던 지식인들조차 황우석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황우석 사태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음모론은 어김없이 출현했다. 나는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는 음모론들을 보면서 실체적 진실 여부가 아니라, 다시 말해 음모론의 ‘내용’이 아니라 끝없이 귀환하는 그 ‘형식’을 문제 삼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음모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논리필연성을 강박적으로 앞세우는 과학적 수사관이면서 동시에, 아무나 세계의 진실을 알아챌 수는 없다고 확신하는 밀교적 선지자였다. 음모론을 단지 몰이성과 비합리와 광기의 병리적 표출로 치부해버리면 그런 모순적 주체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음모론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실재를 향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에 밀착한 일종의 ‘과잉 합리성’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즉,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음모론자가 된다기보다 오히려 이성, 논리, 과학에 물신주의적으로 집착하기에 음모론자가 된다. <음모론의 시대>에서 저자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더 중요한 반대 이유는 음모론이 비합리적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비합리적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음모론은 오히려 합리주의의 과잉에 시달린다. 이른바 ‘극단적 합리주의’, 즉 어떤 우연도 허용치 않으면서 모든 중요한 사건의 배후에 누군가의 의도와 개입을 가정하는 것이 문제다.”(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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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사회심리학
이 책의 백미는 음모론을 ‘고통의 신정론’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신정론(神正論)이란 고통, 악, 죽음 등을 신의 존재에 의거하여 정당화하려는 믿음체계다. 쉽게 말해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고통이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신정론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정론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의 섭리’ 따위의 말로는 현실의 불공평함과 부조리함을 정당화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삶의 고통은 여전한데 신은 죽어버렸기에 대신할 다른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회정론(社會正論), 세속적 신정론이다. 저자는 음모론을 세속적 신정론의 한 유형으로 본다. “종교와 정치의 설득력이 약화되면서 발생한 설명의 빈자리를 다른 세속적 신정론이 탐하기 시작했다. 바로 음모론이다. 고통을 설명하는 문화적 장치라는 점에서 신정론과 이데올로기와 음모론은 같다. 물론 차이가 있다. 신정론과 이데올로기가 밝은 곳에서 활약한다면, 음모론은 어두운 곳에서 활동한다.”(23쪽)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인간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런데 가장 못견뎌하는 건 이유 없는 고통, 불가해한 고통이다. 만약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납득할만한 것이라면, 예컨대 명백한 죄에 대한 적법한 처벌인 경우, 혹은 당장의 고통을 통해 미래의 쾌락이나 이득을 보장받을 경우라면 우리는 종종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인간은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좇는 것만큼이나 의미와 보람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동물인 까닭이다. 음모론은 지금 겪는 곤경과 비극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신정론은 또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채워 넣으려는 시도다.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은 많지만 능력은 늘 미치지 못한다. 우물에 물이 조금밖에 없는데 풍족한 것처럼 보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안에 돌멩이를 채우면 된다. 그러면 우물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물로 가득 들어찬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성의 주요 문제를 다룬 <액체근대>에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채우는 두 가지 부질없는 시도를 ‘전기적 해법’과 ‘상상적 해법’이라 불렀다. 그 두 가지 해법이 곧, 우물을 실제로는 전혀 채우지 못하지만 마치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돌멩이들이다. 전기적 해법은 쉽게 말해 ‘자기계발’이다. 나의 고통과 역경은 나라는 개인의 능력부족에 기인하므로 해결책은 내가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상적 해법’은 고통의 원인을 외부의 희생양, 적에게서 찾는다. 음모론은 바로 이 ‘상상적 해법’에 해당한다. “우리 시대의 핵심적 모순은 무한정 커지는 기대(권리)와 그래서 더 초라하고 비극적인 현실(능력)의 간극인데, 이를 채울 방도는 여럿이다. 과거에는 신정론이 이를 담당했고, 오늘날에는 자기계발과 음모론이 거든다. 외관은 달라도 쓸모는 같다.”(88~89쪽)
책임윤리 혹은 어떤 용기
저자는 ‘통치 음모론’과 ‘저항 음모론’을 구별하면서 음모론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불씨로 작용해 현실변화의 동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저항의 음모론이 내러티브 만들기, 패러디와 조롱 같은 “음모놀이(140쪽)”에 머물 뿐 정작 현실을 바꾸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고 저자는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 정치 영역에서 드러나는 음모론에 관한 분석도 밀도 높고 흥미진진하다. 권력과 음모론의 동학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선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결론부에 이르러서는 냉정했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글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다.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의 3요소-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언급하면서부터다. 저자는 책임윤리가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으며 “구태의연해 보이는” 걸 인정하면서도 “음모의 시대에 책임윤리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거듭해 강조한다.
“악마적 관점을 좇아 ‘그들’을 단죄함으로써 ‘우리’를 정화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며 쉬운 해결책이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그들’과 ‘우리’의 공모 관계를 인정하여 우리의 ‘정치적 책임’을 따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구태의연해 보이는 책임윤리가 빛을 발한다. 책임윤리의 세 요소 중 하나인 균형감각은 사물, 다른 사람(타자)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및 ‘우리’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객관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확보되어야 ‘그들’과 공모자인 나 자신과 우리 자신에게 죄와 책임을 물을 수 있다.”
233~234쪽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나오는 개념인 신정론을 가지고 음모론 분석을 시작한 저자가 끝에 가서 베버의 책임윤리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거인의 어깨에”에 훌쩍 뛰어올라가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그야말로 능수능란하게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는 느낌이다. 음모론의 시대에 책임윤리가 필요하다는 말에 동감하면서도, 저자가 간과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계기 중 하나”로, 정보기관이 각국 정상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이 밝혀지는 등 음모론이 사실로 확인된 경험을 들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긴 하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권력자의 불법과 탈법에 관한 이야기가 ‘카더라’ 풍문으로 떠돌다 끝내 사실로 확인된 사례가 하늘의 별처럼 많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줄리언 어샌지의 위키 리크스 같은 폭로가 음모론의 위력을 더욱 크게 키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정확히 그 반대다. 위키리크스 문서들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기밀문서 속에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각국 엘리트들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착오를 반복하면서도 만나면 시답잖은 농담으로 소일하거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나머지 뒤에서 서로에 대한 험담에 열중하는 멍청하고 음침한 작자들이다. 베일에 가린 전지전능한 악의 세력이 현실의 권력들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그런 음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것은 어쩌면 음모의 실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로 허술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 세계는 내러티브라기보다 해프닝이며, 의미라기보다 무의미라는 것. 그러니 음모론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책임윤리만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용기가 아닐까. 세계의 공허를 직시하는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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