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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요약,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배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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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요약,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배운다.

천아1234 2021. 9. 9. 09:49

6.25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제각각 다르지만, 필자의 경우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던 인천상륙작전, 고지전도 아닌 장사상륙작전이다.

이렇듯 각자 6.25하면 생각나는 상황이 있을 것이고 없는 것도 있을 터인데,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는 거두절미하고 6.25 전쟁에 대해서 정말 하나도 모르는 무식쟁이들을 위해서 역사에 대해서 간단 브리핑 하려고 한다.

이번 글을 정독하게 되면 아마 6.25 전쟁에 대한 큰 정보들은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 6.25 전쟁 요약 그 시작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4시에 북한 쪽에서 조용하면서도 북적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폭풍 244’라는 작전명을 가지고 월남하여 기습작전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 어떤 선전포고 없이, 무력으로 침투하여 순식간에 부산까지 밀고 들어왔으며, 조금만 늦었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하에 공산주의에 빠져 살 뻔했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일으키기 전 김일성은 1950년 3월~4월에 소련에 끊임 없이 남한 공습을 허해달라며 요청했었고, 지속적인 요청에 다시 한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불과 세계2차대전이 끝난지 5년채 되지 않을 때다.

대한민국 당시 내부 상황

이 당시 정권을 맡고 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어수선하고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당시 해외와 국내 독립운동가들 간의 불신 또한 이어졌었던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또한 끝난지 얼마 안되었던 상황이었고, 대한민국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미국의 압박이 컸었다.

북한은 소련, 중국의 지원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경우는 미국의 통제를 받고있었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이 강한 군사력을 얻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 군사 강화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냈었다.

요약

  • 1950년 대 대한민국은 군사력이 미국으로 인해 통제
  • 하지만 북한의 경우 중국 및 소련으로 부터 군사력 지원을 받음
  • 김일성이 소련을 지속적으로 찾아가 대한민국 침공을 설득함(45번 찾아감)
  •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전쟁발발

2. 대한민국 몰락 위기

전쟁이 발발하고 대한민국은 속수무책으로 영토 90%를 제압 당했다. 1950년 9월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95% 영토를 제압 당했고 이때 크고작은 전투에서 작은 승전과 큰 패배를 반복하면서 밀렸다.

역전의 서막

6.25 당일 전쟁이 시작되고 약 16시간 이후 미국에서는 맥아더 더글라스 장군을 한국에 조사단으로 파견한다. 뿐만 아니라 UN군(네덜란드,영국, 캐나다 등) 또한 참전했으며 변화를 알리는 군사적 전략이 오고갔다.

하나 대한민국은 당시 UN군 참전 소식을 들었지만 UN군이 지원을 받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전을 펼치면서 조금씩 후퇴하면서 최대한 늦게까지 땅을 지키면서 뒤로 후퇴했다.

 

이때 낙동강을 주축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여기서 북한군과 끝까지 맞서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장사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 까지이다.

3. 서울 재탈환

여기서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등장한다. 인천상륙작전은 정말 희박한 확률이었고 배를 들어가기가 좁아 실패할 경우 정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는 도박이었다.

허나 결국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서울을 탈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의 정식 명칭이다.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단숨에 수도권을 탈환할 수 있는 작전 이었으며, 해당 작전의 성공 유무가 승패에 크게 나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우선 계획 단계에서 너무 큰 리스크가 존재했는데, 밀물과 썰물 차이로 인해서 만일 썰물시간과 겹친다면 수많은 함선들이 갯벌에 올라가 적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이 있었고

진입로가 작아 거대한 함선이 들어가기에도 어려움이 존재했으며 이와 더불어 수중 지뢰(기뢰)로 인하여 위험성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이러한 작전은 기뢰 위치를 파악하는 작전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해결하기 시작했고 9월 15일 작전대로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었으며, 적군의 퇴로 및 보급품을 끊고 9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에서 최대한 방어전을 펼쳤으나 결국 연합군에 의해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장사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사실 장사상륙작전 또한 같이 동반 되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시행된 기믹전술이며, 학도병으로 구성된 독립부대를 770여 명을 이끌고 적의 보급로를 끊는 작전이었다.

당시 적의 보급로는 해안도로로 유명한 7번 국도 였으며, 본래 적의 보급로를 끊고 바로 후퇴해야 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었기도 했다.

 

9월 15일 새벽 5시 경 작전이 시작되었으나, 북한군의 공습으로 인해 초반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시작했다, 하지만 4시간 이후 모든 대원들이 육지에 도착했고 공격을 이어서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 보급로 차단은 북한근 화력 줄이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인천상륙작전과 시너지효과가 발생하면서 대한민국에 있던 모든 북한군은 전부 고립되었다.

4.지속된 승전보

인천상륙작전과 장사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가져오기에는 충분했다, 북한군을 고립시켰고 군사적으로도 큰 손실을 입혔기 때문에 완전 전세역전이었다. 불과 한달도 안되서 대한민국 영토를 순식간에 되찾은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정말 빠른 속도로 38선을 넘어서 한달만에 평양을 넘기고 함양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11월 달 초까지 지속적인 승전보로 통일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사실상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그리고 UN이 승리로 확정이 되었었다. 하나의 변수가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5. 치열한 전투

중국 전쟁 참여

통일이 코앞이었다, 드디어 조선인민공화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대한민국 깃발이 흔들리는 날이였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던 중국은 바로 그 순간 전쟁에 참여하여 불과 두달만에 북한에서 연합군은 밀려났으며 서울마저 뺏기게 되었다.

영화 한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합군이 가지고 있는 총알 수보다 중국군의 머릿수가 훨씬 많았으며, 압도적인 물량으로 북한에서 연합군을 밀어내었다.

6.25 전쟁 중공군 개입 이유

중공군은 왜 6.25전쟁에 끼어들었을까? 그 이유는 미국과도 연계가 되어 있는데, 우선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피난민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뿌리가 세워지는 위협이 있어서이다.

이러한 위협을 감지한 중국은 연합군에게 38선 이상으로 북진을 하게 될 경우 중국군도 해당 전쟁에 개입하겠다라고 언급을 했다. 하지만 북진을 유엔에서 승인을 해버렸고, 이에 중국은 이를 제제하려고 개입한 것이다.

 

중공군이 개입한 이유는 당시 미국이 대표적인 민주주의였고, 중국과 소련이 대표적인 공산주의였다. 당시 …뭐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은 미국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미국이 대한민국을 도와 북진을 진행했지만, 이것을 트집잡아 그냥 일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고지전

이후 갑작스러운 중공군 개입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났지만, 재정비를 마친 유엔 그리고 미국 대한민국은 다시 북진하기 시작했고 금방 수도를 탈환하고 빠르게 북진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맞이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38선을 기점으로 더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사실 화력적인 부분이나 군사력을 비교했을 때 전혀 무서울 것은 없었지만, 세계3차대전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이 있었을 때 만주와 북한에 핵을 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의견도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사실 정말 세계대전으로 발발할 수 있는 요소였기에 기각되었다.

이에 유엔 , 미국 등 각 지휘관 등은 휴전을 주제로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이승만의 경우는 현재 상태에서 휴전을 바라지도 않았으며, 포로송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땅을 탈환하기 위하여 38선에서 끊임 없는 탈환전이 있었다. 이는 ‘고지전’이라고 불린다,

6. 휴전협정

이승만의 욕심

휴전협정 전까지 이승만은 수없이 휴전을 반대했었다, 북진으로 통일을 해야한다는 그의 야망이 드러났었는데 이러한 모습 때문에 회담 내에서 그의 자리는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협상 결렬의 이유는 여기서 멈추면 안되며 그냥 북진을 하여 통일을 해야한다고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진행했는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 그저 대한민국을 넘어 좀더 많은 곳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심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존재한다.

아무튼 이렇게 휴전에 대해서 많은 난항을 겪던 와중 1953년 소련 스탈린이 죽으면서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스탈린이 죽으면서 협상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깨우친 이승만은 비협조적이던 모습을 버리고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미국에게 방위조약 체결을 할 경우 휴전에 동의하겠다라고 했다.

뭐 사실 여기서 깔끔하게 해결이 되면 상관이 없겠는데, 미국의 반응은 사실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우선 전쟁을 끝을 내려면 미국 자체에 군사력이 동원이 되야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휴전에 지속적으로 군사력이 남의 나라에 소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 지체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승부수를 띄웠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포로 2만6천명을 미국과 상의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으로 그냥 풀어준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자체가 문제가 된 이유는, 동의 없이 진행한 것도 있었는데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애초에 포로송환 문제로 많은 난황을 겪고있었는데, 이것을 그냥 이승만 대통령이 멋대로 진행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의 경우 좀 특별했는데, 나라대 나라가 아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에 해당이 되는 것이다. 즉 포로를 바로 송환해서 각 나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포로가 직접 나라를 선택할 수 있게하는 선택권을 가졌어야 하는 것이다.

유엔측은 포로를 송환할 경우 포로가 직접 나라를 선택할 수 있게하자 라는 논리였고 공산주의 측은 그냥 무조건 송환요청이었다. 허나 이승만은 그냥 멋대로 풀어준 것이다.

사실 이럴 경우 더더욱 미국은 휴전협정이고 뭐가 대한민국에 핵을 떨어트리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어차피 지 멋대로 하는데 뭐하러 평화협정이 필요한가…

하지만 결국 미국은 또 사고 칠 것같은 분위기였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체결을 약속하고 휴전협정에 들어갔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약 3년간의 전투는 잠시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휴식기를 가진지 어느덧 70년이 넘었다.